관광 성주군 트래블 l 성주에서 즐기는 언택트 관광 명소를 찾아서

성주군 트래블 l 성주에서 즐기는 언택트 관광 명소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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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심신이 움츠려들고 있는 가운데 기상 이변이 몰고 온 폭우로 전국이 수마에 시달리고 있다. 수해가 할퀴고 간 지역에는 망연자실한 수재민을 돕고자 구슬땀을 흘리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이럴 때일수록 심신의 힐링이 필요하다. 짬을 낼 수 있다면 성주로 발길을 옮겨보자. 비대면, 비접촉으로 생활 속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집콕’의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는 성주군의언택트 여행지를 소개한다.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의 태봉 정상에 위치하는 전국 최대의 태실지인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대왕의 19왕자 중 큰 아들인 문종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과 원손인 단종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보존돼 있다. 이곳은 생명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세계 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성주는 성산가야의 터전임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대표적은 문화유적 성산동 고분군. 우리나라 7대 민속마을 중의 하나인 한개마을, 영남에서 가장 큰 산성인 독용산성, 선현의 숨결과 고즈넉한 멋스러움이 가득한 백매로 유명한 회연서원 등 많은 역사․문화 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국립공원 가야산과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가야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드는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한 포천계곡, 대가천의 맑은 물, 기암괴석과 수목이 절경을 이루는 무흘구곡, 전국 최고의 빼어난 자연경관를 자랑하는 성주호, 아시아 최대·국내 최초 수상레저파크가 있는 아라월드, 산세가 아름답고 완만해 개인부터 가족까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성주호 둘레길, 대한민국 생태테마관광지로 선정된 긴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오백년 왕버들 숲인 성밖숲은 8월이면 보랏빛 맥문동이 아름답게 피어 전국의 사진작가가 몰려들고 있으며, 한국관광공사 언택트 100선에 선정된 곳이다.

만물상

성주군 가야산은 1972년 9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 면적은 76,256㎢로 소백산맥의 지맥에 위치하고 있다. 가야산은 한국 12대 명산의 하나이며 예로부터 조선 8경에 속하였다. 주요 봉우리로는 상왕봉(1,430m), 칠불봉(1,433m), 남산제일봉(1,010m)등이 있으며 그 사이로 아름다운 홍류동 계곡이 흐르고 있다. 합천군 쪽의 가야산은 산세가 부드러운 반면 성주군의 가야산은 산세가 가파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살짝 힘들지 모르지만 눈은 호강을 할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자원이 가야산 만물상이다.

만물상은 금강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야산 만물상은 한마디로 ‘기암괴석의 향연’이고‘ 자연의 교향악’이라고 자랑한다. 코끼리바위, 돌고래바위, 불상바위, 두꺼비바위, 쌍둥이바위 등 갖가지 모양을 한 바위가 지천에 뽐내는 듯 널려있다. 가야산 만물상은 2010년까지 약 40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원시 그대로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금강산의 만물상에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아름다운 가야산의 대표 자원이다.

세종대왕자태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태는 태아의 생명력으로 여겨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뤘다. 왕실에서는 전국의 명당에 태 항아리를 안치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성주의 세종대왕자태실은 규모나 가치면에서 으뜸이며 지금은 생명문화의 상징으로 알려지고 있다.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禪石山, 742.4m) 아래의 태봉(胎峰) 정상에 위치하는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9왕자 중 큰 아들인 문종(文宗)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과 원손(元孫)인 단종(端宗)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있으며, 이곳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됐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은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1977년에 태실을 정비하던 중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분청인화문개(粉靑印花紋蓋) 2점(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각 1점 소장), 분청인화문완(粉靑印花紋)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평저호(平底壺)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지석(誌石) 3점(국립경주박물관소장) 등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구조는 연엽형의 개첨석(蓋石)(저경(底徑) 102㎝, 고(高) 42㎝), 구형(求形)의 중동석(中童石)(고(高) 26㎝, 하경(下徑) 80㎝, 상경(上徑) 75㎝), 방형(方形)의 연엽대석(蓮葉臺石)(변(邊) 125.5㎝. 고(高) 60㎝), 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비문에‘ㅇㅇ(대)군명태장 황명연호연월일입석(ㅇㅇ(大)君名胎藏皇明年號年月日立石)’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세조가봉비 비문은 멸실되었다.

성산동 고분군

성주읍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성산(해발 389.2m) 자락을 방문하면 볼 수 있는 신기한 장관이 있다. 산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무덤들이 서로 형제처럼 줄이어 분포하고 있는 곳으로 가야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들이다. 현재까지 총 129기가 지정되었으며 성주군에서는 지속적으로 정비와 복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성산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1·2·6호분 및「대분(大墳)」·「팔도분(八桃墳)」이 발굴조사 된 바 있으나 조사의 경위나 결과에 대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86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승왜마을 남쪽 능선에 분포하는 대형봉토분 5기가 발굴 조사됐다.

지금까지 조사되어 밝혀진 무덤의 내부구조를 보면 매장주체부인 석실(石室)의 구조가 할석으로 축조한 할석식(割石式)과 대형판석을 주로 사용한 판석식(板石式)의 수혈식석실분(竪穴式石室墳)으로 되어 있다.

고분의 묘장(墓葬)형태는 1봉토 내에 2인 이상을 매장한 순장(殉葬)에 의한 다장묘(多葬墓)로서 별도의 순장곽(殉葬槨)을 설치하거나 부곽(副槨)의 한구석에 순장한 형태이며, 주실(主室)인 석실에는 크기에 비해 유물이 빈약하고 부곽에는 넘칠 정도로 많은 유물을 부장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발굴조사에서 환두대도(環頭大刀), 금제이식(金製耳飾), 은제과대(銀製帶), 관식(冠飾)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986년 발굴조사에서 대호(大壺)를 비롯한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 단경호(短頸壺), 유개고배(有蓋高杯) 등 토기류와 은제행엽(銀製杏葉), 재갈, 교구( 具) 등의 마구류(馬具類)를 비롯한 2,07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독용산성

독용산성은 소백산맥의 주봉인 수도산 줄기에 쌓은 해발 955m의 독용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영남 최고 규모의 산성이다. 여러 코스로 조성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서 발아래 성주호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어 어느덧 정상에 다다르게 되는 곳으로 한 폭의 풍경화를 감상하게 되는 기분을 들게 하는 곳이다.

독용산성의 둘레는 7.7km(높이2.5m 평균폭넓이1.5m)에 이르며 산성내 수원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영남지방에 구축한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성벽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절석(切石)하여 축조하였는데, 막돌흩은층 쌓기를 하였으며 사이사이의 공간에는 잔돌끼움 쌓기를 하여 성벽의 틈새를 메꾸는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성벽의 축조방법은 협축법(夾築法)과 편축법(片築法)이 고루 사용되었으며, 계곡을 지나는 성벽의 경우에는 단(段)을 지워 성벽 쌓기를 실시하여 급경사에 따른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성문·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무너지고 없어져서 돌무더기와 그 옛터로 짐작되는 건물지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개축할 당시 독용산성은 둘레가 4,581보(步)이고, 여장(女墻)이 2,405첩(堞)에 동옹성(東瓮城), 장대(將臺), 동서남북의 네 포루(砲樓), 동문(東門), 수구문(水溝門), 남소문(南小門)등이 있었고, 합천(陜川), 거창(居昌)의 군병(軍兵)과 군향(軍餉)을 배속하는 등의 규모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이때에 성을 관리하기 위하여 객사(客舍), 동·서창고, 군기고(軍器庫) 등의 건축물이 갖추어 졌으나, 조선 말기에 군사적인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되어 성곽과 시설물들이 허물어져 현재는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무흘구곡

봉황이 비상하는 모습을 지닌 봉비암을 제1곡으로 시작하여 회연서원 기암괴석으로 연출되는 절벽, 마음의 욕심을 비우고 가야할 듯 한 배바위 정자, 선바위 등 한강 정구선생이 느꼈던 그 풍광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느낄 수 있는 성주군의 숨겨진 보물같은 자원이다.

무흘구곡은 총 35.7㎞에 이르는 자원으로 경북 성주군의 수륜면․금수면부터 김천시의 중산면까지 이어져 있다. 그 중 1~4곡은 성주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5~9곡은 김천시에 입지하고 있다.

제1곡 봉비암(鳳飛岩), 제2곡 한강대(寒岡臺), 제3곡 무학정(舞鶴亭), 제4곡 입암(立巖), 제5곡 사인암(捨印巖), 제6곡 옥류동(玉流洞), 제7곡 만월담(滿月潭), 제8곡 와룡암(臥龍巖), 제9곡 용추(龍湫)로 구분되어 있다.

대가천의 맑은 물과 주변 계곡의 기암괴석, 수목이 절경을 이루어 조선시대 성주가 낳은 대유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1543~1620)이 중국 남송(南宋)시대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7언절구의 시를 지어 노래한 곳으로 경관이 아주 빼어나 행락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성밖숲

성밖에 조성된 숲이라는 단순한 이름 뒤에는 성주의 다양한 역사와 생활사가 담겨진 가치 높은 공간이다. 밤나무 숲으로 이루어졌던 이곳은 임진왜란 이후에 왕버들로 숲을 다시 조성하였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 여름 왕버들과 함께 맥문동이 연출하는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성주 경산리의 성(城)밖숲은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성주읍성(星州邑城) 밖에 조성한 숲으로 300~500년 생의 왕버들 53그루가 자라고 있다.『경산지(京山志)』및『성산지(星山誌)』의 기록에 의하면 성밖마을의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는 등 여러 흉사(凶事)가 이어지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숲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성밖숲은 노거수 왕버들로만 구성된 단순림(單純林)으로 학술적 가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의 풍수지리 및 역사·문화·신앙에 따라 조성되어 마을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과 토착적인 정신문화의 재현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마을 비보림(裨補林)으로 향토성과 역사성을 가진 숲이다.

현재 성밖숲은 축제 등 각종 행사를 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산책 공간, 생활체육 활동 공간 등 다양한 주민생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개마을

600년의 명맥을 이어온 마을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칸칸이 쌓여있는 담장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그 역사와 가치를 간직한 곳이 바로 한개마을이다. 가옥 하나하나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풍수에 따라 구성된 마을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즐거운 체험이 되며, 구불구불 다 이어놓으면 3㎞가 넘는 고샅길 담장은 한개마을을 찾게 되는 또 하나의 기쁨이자 목적이 된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入鄕)하여 개척한 마을로 현재는 그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성산이씨 집성마을이다. 17세기부터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등의 이름난 큰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다. 또한 마을의 전통한옥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토석(土石)담이 잘 어우러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잘 동화되어 있어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마을이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큰 나루 또는 개울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 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개’라는 이름은 곧 ‘큰 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순 우리말에서 온 이름이다. 마을의 지형은 뒷산인 영취산(해발 322m) 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내리고, 마을 앞에는 백천이 흐르고 있어서 영남 제일의 길지(吉地)를 이루고 있다.

한개마을은 전통을 많이 유지하고 있는 성주지역의 동성촌을 대표할 수 있는 마을로서 75호의 전통가옥들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10곳에 이르고 있다. 건축물의 대부분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었으나, 전체적인 마을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및 평면이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포천계곡

물반 사람반인 해수욕장이나 워터파크의 번잡함을 벗어나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체험하기 좋은 명소이다. 여름철이면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으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이란 말이 왜 나왔을까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계곡자원이며, 물놀이와 더불어 삼림욕은 덤이 되는 곳이다.

포천계곡은 가야산의 여러 계곡 중 대표적인 명소로서 물이 맑고, 풍부할 뿐만 아니라, 웅장하고 힘찬 가야산 전경과 어우러져 옛 성주 선비들이 심신과 학문을 도야하는 장으로 삼았던 곳이다.

포천이란 말은 계곡 물이 마치 광목천과 같다 하여 부른 말이기도 하며, 계곡의 반석에 심청색 무늬가 많아 마치 베를 널어놓은 모습 같다하여 포천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선생이 만년을 보낸 만귀정(晩歸亭)이 상류에 있으며, 만귀정 옆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찬 기운으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있어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약 7km에 이어지는 계곡은 우거진 숲과 어울려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다.

회연 서원

회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그의 사후인 인조 5년(1627)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세원이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선조 16년(1583)에 정구가 회연초당(檜淵草當)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서원의 주향(主享)인 한강 정구는 외증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예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대학자였다. 그는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직에 나올 경우에는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 우승지(右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문목(文穆)의 시호(諡號)가 내려 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구(舊)사당, 강당, 동·서재, 신(新)사당, 전사청(典祀廳), 견도루(見道樓) 등이 있으며, 정구가 직접 조성한 서원 앞뜰의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으며, 그 밖에 한강 정구와 관련된 유물,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 전시관과 향현사(鄕賢祠), 관리사가 있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를 주향(主享),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종향(從享)으로 모시고 향현사에는 신연(新淵) 송사이(宋師頤), 용재(容齋) 이홍기(李弘器),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동호(東湖) 이서(李) 등 한강 정구와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전세리 기자 jsr@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