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언론 보도의 형식을 하고 유포된 거짓 정보를 가짜뉴스(Fake News)로 정의하고 있다. 가짜뉴스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갈 것이다. 다만 통신기술의 발달로 전파 속도와 범위가 초고속으로 광범위해졌을 뿐이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인류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곧 가짜뉴스에 대한 투쟁의 역사와 다름이 없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가짜뉴스 사례를 무수히 많이 찾을 수 있다. 백제 무왕이 지은 ‘서동요’는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그가 허위 사실을 노래로 만들어 유포한 가짜뉴스다.
현대의 가짜뉴스 특징은 그 논란의 중심에 인터넷 통신이 있다는 점이다. 대중이 뉴스를 접하는 채널이 신문·방송에서 포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으로 옮겨졌다.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미디어 플랫폼에 ‘언론 보도’로 위장하고 나타난다. 이 가짜뉴스들은 선정적인 표현으로 시선을 끌기만 하면 손쉽게 유통·확산된다. 지난 미국 대선 기간 중 ‘프란치스코 교황이 도널드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는 가짜뉴스가 페이스북에 등장하면서 가장 많이 공유된 정보라는 점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가짜뉴스는 그 정체가 모호하다. 어떤 뉴스가 가짜인지, 그것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쉽게 알 수 없다. 미국 대선을 흔든 가자뉴스들의 진원지는 마케도니아의 한 소도시에 거주하는 10대 후반 청소년이었다. 이들이 친트럼프 성향의 뉴스를 생산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호의적이고, 힐러리 클린턴에 악의적이어서가 아니라 트럼프의 뉴스가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뉴스 콘텐츠에 대한 돈은 대부분 광고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광고주들이 가짜뉴스에 직접 광고하지는 않는다. 모든 광고는 ‘구글 애드센스(AdSense)’와 같은 광고 중개 서비스를 통한다. 광고주가 중개업체에 돈을 지불하면, 중개업체는 금액별로 광고를 배치한다. 높은 조회수가 나오는 사이트일수록 높은 금액의 광고를 배치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가짜뉴스 같은 자극적 콘텐츠가 돈이 된다.
가짜뉴스로 인한 피해는 막심하다. 최근 정치권에서 ‘가짜뉴스’를 사회악으로 지목하고 엄정한 대응에 나서며 강력 규제론이 대두되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가짜뉴스와 관련해 25개도 넘는 법안이 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안들의 규제 대상인 가짜뉴스는“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 “거짓의 사실 또는 왜곡된 사실”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일부는 “언론 보도로 오인하게 하는 내용의 정보‘” 등으로 한정하고 있다.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가짜뉴스를 보도한 언론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허위보도나 가짜뉴스로 인한 피해에 최대 3배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악의적’의 판단 주체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최종 판정은 법원의 하겠지만, 자칫 정부나 정권에 비판적인 보도를 이해당사자가 미리 결정하겠다는 의도로 보일 수 있다. 이해관계에 따라 비판과 악의의 경계가 모호해 민주주의의 기초인 언론·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독소조항이 될 가능성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언론에 적용하는 것도 논란거리다. 언론은 오보를 시정하고, 피해를 줄 경우 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아울러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잘못된 보도가 있으면 정정 보도를 요청할 수 있고, 언론사와 기자를 상대로 법적 소송도 제기할 수 있다.
가짜뉴스를 규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명확성의 원칙에 입각한 규제를 해야 한다. 명확성의 원칙은 법률이 처벌하고자 하는 행위가 무엇이며 그에 대한 형벌이 어떠한 것인지를 누구나 예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도록 구성요건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규제 대상자에게는 행동지침을 제공하고, 법 집행자에게는 객관적인 판단지침을 제공해 차별적이거나 자의적인 집행을 예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명확한 규범으로 표현의 자유를 규제한다면 헌법상 보호받는 표현의 권리를 위축시킬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나 견해, 사상을 표출하고 이러한 표현들이 상호 검증을 거치도록 하는 사상의 자유 시장 기능이 상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의 징벌적 규제가 자칫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돼선 안 될 것이다.
전병열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