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끝자락 12월이다. 1년간의 일을 되돌아보며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위해 서로의 고생을 독려하는 모임과 회식이 빈번해지는 시기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회포를 풀자는 좋은 취지지만, 과음이나 지나치게 위계질서를 따지는 잘못된 음주 문화, 회식 자리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성추행과 같은 문제들은 절대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연말회식도 창의적으로
예전의 연말회식은 단순했다. 사원 전원이 식당에서 밥 한 끼 먹고 술을 마시면 끝이었다. 다같이 ‘부어라 마셔라’하는 분위기에 각자 몸만 잘 사리면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요즘은 연말회식에도 창의력이 요구된다. 젊은 직원들은 상사의 구미에 맞춰 장소 섭외부터 단합을 위한 이벤트, 행사 진행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 술을 과하게 마시지 않으면서 분위기도 좋아야 하고,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분위기의 모임을 기획한다. 회식 대신 워크숍을 가거나 등산, 영화 관람, 볼링, 야유회 등 각양각색의 모양을 띄면서 모임을 위해 온갖 정보력을 동원하는 것에 직원들은 지쳐간다.
오가는 술잔 속 싹트는 성희롱
최근 붉어진 기업 내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대다수 기업이 연말회식을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발표한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희롱 발생장소는 회식장소가 44.6%였고, 피해자 성별은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회식자리에서 일어나는 성희롱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리하게 옆자리에 앉히고 술을 따르게 하거나, 가슴이나 다리 등 신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도 성희롱의 일종이다. 안마를 빙자해서 애무를 하거나, 음담패설, 그밖에 사회통념상 성적 굴욕감을 유발하는 모든 것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모두가 모여 있는 1차 회식자리에서는 성추행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소 적은 편이다. 2차로 가는 노래방이나 귀가 시에 자가용이나 택시 안에서 발생하는 편이 높다. 전문변호사들은 피해자들이 피해를 당할 당시 싫은 의사를 분명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제3자가 지금 상황을 성희롱이나 성추행이라고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해야 추후에 사건을 송치해야하는 경우가 발생했을 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성희롱과 성추행, 성폭력 등을 경계하기 위해 아예 연말회식을 취소하기도 했다.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 것이다.
상사 중심의 강압적인 분위기
회식은 직장 내 친목 도모이며, 회포를 풀기 위한 업무의 연장선상이라고들 많이 이야기하지만, 회식 자리는 공식적인 업무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시간외 수당도 없다. 충청남도가 지자체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회식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873명 중 44.6%가 기존 회식 문화에 “불만족스럽다”고 응답했다. 불만족 사유로는 상사 중심 문화(38.4%), 과도한 음주와 강제로 권하는 술(25%), 회식 참여 강요(21.3%), 일방적인 일정·장소 결정(15.1%) 등이었다.
워크숍으로 가는 경우에는 젊은 사원들의 고충이 하나 더 늘어난다. 바로 장기자랑이다. 모두가 즐겁게 준비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사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임한다. 직장생활 5년차인 김 모(32세)씨는 “워크숍이든 회식이든 장기자랑은 젊은 직원들을 우스갯거리로 소화하는 것 뿐”이라며 “결국 장기자랑의 끝에는 부장이나 사장님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끝나니 누구를 위한 행사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젊은 층 사이에서 회식은 개인 시간을 할애해서까지 직장에 봉사하는 쓸모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도드라지고 있을 정도다.
음주로 인한 사건사고 늘어나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한국인 1인당 연간 알코올 섭취량은 12.3L로 세계 평균섭취량 6.2L의 두 배에 달한다. 이런 수치를 반증이라도 하듯 연말연시 과다한 음주로 인한 사건사고 및 건강피해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나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와 피해가 연말연시에는 ‘가히 치솟는다’는 표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다. 경찰은 내년 1월까지를 특별단속 기간으로 정해, 유흥가와 음식점 밀집지역에서 매일 단속을 실시하고, 매주 한 차례 일제단속도 병행한다. 특히 심야시간 뿐만 아니라 출근시간에도 단속을 벌일 계획이다.
경찰의 단속으로 음주운전 사고는 소폭 감소했다. 하지만 회식 자리에서 과음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사고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조직구성원 간의 정이나 끈끈함, 결속력을 다지는 회식 문화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권의 희생을 강요해도 된다는 믿음은 가히 시대착오적이다. 상사가 주는 술잔을 부하직원은 거부하기 어렵다. ‘까라면 까라’식의 권위주의가 윗선에서 도사리고 있고, 여성을 ‘관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구시대적인 시각까지 도처에 즐비하다.
이와 같은 현상에 따라, 일부 지자체에서는 즐거운 회식을 위해 ‘한 가지 술로 1차에서 끝내고 오후 9시 이전에 귀가하라’는 ‘119 지키기’ 실천에 돌입하기도 했다.
모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계질서만 가득하고 성희롱 성추행의 위험까지 감수해야하는 모임을 그 누가 기쁘게 반길 수 있을까. 오는 12월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연말 회식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