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이변, 평등주의 진보정치 쇠퇴의 서곡
오늘날 전 세계 보편적 정치경제체제의 이념적 기반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결합한 사회민주주의다. 전후 민주주의의 자유의 이념은 약화되고 평등의 이념이 압도하면서 평등민주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제 자유보다도 경제 평등이 모든 인류가 목마르게 추구하는 이상이 됐다.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 불평등을 초래하는 모순된 사회’라는 사회주의 진영의 공격에 대응한다며 재분배를 통해 더욱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인 복지국가를 지향해 왔다. 경제학도 ‘복지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개발을 통해 이에 화답하고 이를 선도했다. 전 세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키워왔다. 사회주의 경제 평등 이념의 고향인 서구 유럽은 60~70년대 이후 자연스럽게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했다. 또한,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영미권도 ‘수정자본주의’라는 이념으로 이에 동참했다. 2차 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들도 일부 사회주의 독재라는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안착하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던 공산 사회주의 체제는 이제 북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몰락하였지만, 이들은 아직도 사회주의 이념에서 온전하게 탈출하지 못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받아들이고 있지만, 경제 평등의 이념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마 예외라면 50여 년의 사회민주주의에서 탈피하려 애쓰는 인도와 지난 30여 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내걸고 고도의 자본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중국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절반을 지배하던 사회주의 체제는 공식적으로는 몰락했지만, 사회주의 경제 평등 이념은 강력한 ‘경로 의존성’을 과시하면서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쓰나미처럼 덮치고 있다. 여기에 1인 1표의 민주주의 제도가 좋은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1인 1표 민주주의의 종착역은 자유민주주의라기보다 평등민주주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럼 이제 인류가 고대하던 정치⋅경제적으로 보다 평등한 사회는 실현되었는가? 불행하게도 오늘날 전 세계는 거의 공통으로 ‘장기 저성장과 소득의 양극화’라는 전혀 원치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경제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평등을 추구한 사회가 모두 불평등의 심화에 직면하는 역설에 정치학도, 경제학도, 문제의 원인도, 답도 못 찾고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왜 이런 역설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경제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의 ‘경제적 성과에 따른 차별화와 동기부여 기능’을 약화시킴으로써 국민의 경제하려는 의지를 차단하여 경제의 저성장과 하향 평준화를 초래하게 된다. 경제의 하향 평준화란 중산층의 몰락과 이를 통한 소득의 양극화로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의 저성장과 양극화는 이미 ‘평등주의 경제정책’의 예견된 결과이다. 선진국들이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서고는 있으나 ‘평등’이라는 도그마화 된 이념 속에 갇혀 감히 평등주의의 문제점을 거론조차 못 하고 있다.
필자는 트럼프의 승리를 그동안 기성정치의 평등이라는 진보이념에 억눌려 경제의 하향 평준화 속에 무너져 내리던 미국 중산층이 드디어 폭발해 반격에 나선 결과라고 해석한다. 1835년 프랑스의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저서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민주주의를 비교하면서 미국인들은 자유를 원하는 데 비해 프랑스인들은 자유를 버리고 노예가 되는 한이 있어도 평등을 원한다고 했다. 지금 왜 평등주의 진보정치의 폐해가 더 심한 유럽보다 미국에서 먼저 평등주의에 대한 반격이 시작됐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사여구로 포장되었지만, 결국은 저성장과 불평등을 초래하는 평등주의 이념 때문에 자유를 더는 희생할 수 없다는 미국 중산층의 선언인 셈이다. 향후 평등지상주의 진보정치로부터의 탈출이 유럽과 일본으로, 그리고 한국으로까지 확산될 지 지켜볼 일이다. 평등의 미망에 사로잡힌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 그리고 대중의 각성 없이 변화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평등주의정치가 죽어야 경제가 산다
민주정치와 경제번영은 친구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 민주정치가 심화될수록 저성장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죽어야 경제가 살고 중산층이 복원될 수 있다. 오늘날의 보편적 정치체제는 민주정치이다.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평등이념은 사치재와 같아 경제성장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경제 평등에 집착하고 ‘경제민주화’에 집착한다. 오늘날 세계 정치가 모두 사회주의 평등이념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로 귀일하는 이유이다. 한국도 30여 년 전에 도입된 경제민주화란 유사 사회주의 이념이 2만 불 소득을 넘으면서 더 극성을 부리는 이유이다. 이제 사회주의 경제 평등 이념이 전 세계를 쓰나미처럼 덮치고 있다. 불행하게도 민주주의 정치는 그 1인 1표라는 속성상 사회주의의 함정을 벗어나기 어렵다. 농경사회는 모든 인간이 맬서스적 빈곤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중산층이 없는 사회이며, 따라서 귀족계급을 빼고는 모두 가난한 하향 평준화된 사회였다. 오늘날과 같은 중산층은 자본주의 경제 현상이다. 어떻게 자본주의가 중산층을 만들어내었는가? 중산층은 농토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창출된다. 자본주의 경제는 인류를 농토에서 해방시켜 기업조직에 흡수해 경제발전에 참여시킴으로써 더욱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시스템을 통해 높은 소득을 향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규모의 중산층을 만들어 냈다. 즉, 자본주의 기업의 일자리 창출능력이 중산층의 바탕이 됐다. 자본주의적 대형 주식회사 기업이 없는 경제에서는 중산층이 형성될 수 없다. 따라서 양극화는 바로 기업성장 부재, 기업투자 부진, 기업 일자리 창출 능력 저하와 같은 의미가 된다. 기업투자를 통한 기업성장과 일자리 창출만이 중산층을 만들어 내어 성장과 동시에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이 없는 농경사회나 사회주의 경제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하향 평준화된 사회로서 중산층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기업이 쇠퇴하게 되면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지고 중산층은 축소되고 양극화로 치닫는다.
시장과 기업의 본질은 구성원들 간의 성과에 따른 경제적 보상의 차별을 통해 모든 인간을 동기부여 함으로써 경제의 성장과 일자리와 중산층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만일 민주정치가 이런 차등과 발전의 원리와는 반대로 사회주의적인 ‘나눠먹기식’ 평등보상 제도를 만들어내면 시장과 기업은 작동을 멈추고 성장도 일자리 창출도 멈추고 중산층은 사라지고 경제 하향 평준화를 향한 양극화는 심화된다. 지난 반세기 이상을 국민 모두를 중산층으로 만든다는 사회주의 평등 이념 하에 열심히 추진한 소득재분배, 노조 활동 강화, 반기업적 정책 등에 기초한 복지 국가제도가 오히려 중산층을 죽이고 양극화를 초래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노력과 성과와 관계없이 정치적 힘으로 평등한 결과를 보장하겠다는 사회에는 중산층도, 동반성장도 없고 저성장과 양극화만 만연하게 된다.
앞에서 지적한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탄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은 지난 50~60년간 수정자본주의, 복지국가 이념 하에 소위 진보적 평등 이념이 주류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공화당과 민주당 등 기성정치권 모두가 평등주의의 노예가 됐다. 결과는 저성장과 양극화, 즉 경제 하향 평준화와 백인 중산층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이들의 반란이 트럼프의 당선을 가져온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자체 모순인 계급투쟁과 자본수익률의 저하로 해체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마르크스 논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번영을 먹고 자란 민주주의 평등 이념에 의해 역으로 해체되고 있다. 지난 세기 실패한 무산자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실험을 제1차 사회주의 혁명기라 한다면, 지금의 민주주의에 의한 사회주의 광풍은 제2차 사회주의 혁명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개발연대 세계 최고의 동반성장을 가져온 한강의 기적은 수출산업육성, 중화학공업육성 등의 기업육성정책을 통해 중소기업이 지속적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공급되고 중산층이 양산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은 정치권이 세계 사회민주주의 조류에 휩쓸려 국가⋅사회⋅경제의 균형발전과 경제민주화라는 사회주의 평등 이념을 앞세워, 대기업 간 경쟁촉진보다도 경제력 집중 규제라는 성장 유인을 차단하는 기업투자 규제에 목매어 기업의 해외 투자를 조장하고 국내 일자리 창출을 억제함으로써 중산층의 축소를 조장했기 때문에 저성장과 동시에 양극화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말 70% 이상이 중산층이라던 한국 사회가 소득 2만 불을 훌쩍 넘은 지금 양극화를 얘기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가는 기업과 개인들의 성장을 억제해야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된다는 사회주의 평등 이념에 휩쓸린 정치를 바로잡지 않고 대한민국의 성장과 중산층 복원은 불가능하다.
글.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서울대(경제학), 미국UCLA(경제학 박사)를 졸업
-전)미국 연방준비은행 경제연구관, 전)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서울대 초빙교수
-현)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