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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수를 바라보는 연세임에도 애국·애민 정신과 열정은 남달랐다. 자신의 사후에도 굶는 사람 없는 서구를 만들기 위해 ‘사랑의 띠잇기’ 후원이 지속 가능하도록 본인의 소유인 시가 30억 원 상당의 땅을 기부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상징인 대한민국 국호 지키기, 국기 태극기 지키기, 국가 애국가 지키기 등 3수 운동을 펼치며 전 국민적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문화관광 활성화를 위해 서구문화원을 건립하고 부산관광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최근에는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 사택으로 사용됐던 서구 부민동3가 22번지 주택을 전시관으로 개조해 역사교육장으로 만들어 부산 관광산업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대통령께 건의서를 제출했다. 미개 문화에서 최고 문화 민족으로 발전 “1세기 동안의 대한민국 문화 변천 과정을 체험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당시 지식인은 한 면에 1명 정도 중학교 졸업한 사람이 전부야. 내가 일제 때 초등학교 선생을 했어요. 이북에서는 교장도 맡았고.” 그의 역사문화 이야기가 시작됐다. 100년 전 한국은 미개 국가였다.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니고 여성들은 가슴을 가릴 속옷도 없었다. 그야말로 야만적인 생활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오늘날 세계적인 문화를 향유하는 일류 국가가 됐다. 문화원장은 가슴에 맺힌 그 역사를 털어놓고 싶어 했다. “내가 7살부터 10살까지 소를 먹였는데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녔어요. 10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2달 만에 아버지께서 소먹일 사람이 없다고 학교를 그만두라고 했어요. 그때는 공부해서 취직하는 게 아니라 그냥 농사짓는 게 전부였지. 직장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농사짓는데 공부가 무슨 필요가 있었겠어요. 그래도 맏이는 학교를 보냈어. 보내오는 편지도 읽어야 하고 제사 지낼 때 제문을 읽어야 했거든. 차자나 여자들은 아예 학교 문턱도 못 넘게 했지. 우리 집 식구 8명 중 아버지와 형님을 제외하고는 전부 문맹이었어. 우리 집은 종가라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음에도.”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학교를 세웠지만, 학교 보내는 집이 없었다. 일본군에 순종하기 싫은 양민 자녀들이 입학을 거부하자 강제로 할당이 됐다. 결국, 양반들이 데리고 있는 종의 아들을 대신 보냈는데, 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이 된 것이다. “시골에서 경찰의 권한이 막강했는데 검열을 다니면서 자신의 어릴 적 주인집에 갔어요. 그런데 주인은 자기 종의 아들이 경찰이 돼 왔으니까 출세했다고 반가워하며 자네, 자네! 하고 부르면서 대접을 하려는데, 갑자기 그 경찰이 주인의 뺨을 때리면서 호통을 치고 불합격이라며 돌아가 버린 거야. 온 동네 사람들이 놀라서 손이야 발이야 빌고 다시 사찰을 받았는데 그 주인 할아버지도 잘못했다고 사과했어. 우리 세대는 그런 사회를 살은 거야.” 당시 함경북도에는 소련 공산당이 들어오고 천도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야학을 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그는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야학으로 초등학교 4학년 수준까지 공부했다. 고향에서는 더 이상 학교에 갈 수가 없어 자기 앞으로 준 송아지를 팔아 고모가 살고 있는 만주 훈춘으로 도주하게 된다. 그는 고종 형이 선생으로 있는 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해 초등학교를 졸업한다. 훈춘에는 20개의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중학교는 1곳으로 정원이 40명이다. 초등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그는 중학교에 진학해 춘원 이광수의 소설 등을 많이 읽고 그를 숭배하게 된다. 춘원의 <민족개조론>에 영향을 받은 그는 독립을 위해서 문맹을 퇴치하고자 초등학교 선생을 지망한다. 초원에다 야학을 세우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남녀 선생 2명과 함께 학교를 못 다닌 사람들을 모아 가르쳤다. 봉급을 털어서 책과 공책도 사주고 연필도 사주면서 3년을 운영하던 중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허의리로 돌아온 그는 허의 초등학교 대표로 근무한다. 얼마 후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숙청이 시작됐는데, 다행히 학교 선생은 숙청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때는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무조건 사살시켰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산당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소련이 원자탄이 없었어. 미국은 대한민국을 독립시킨 후 자기들의 무기를 모두 가져가버린 거야. 이북은 소련의 남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6·25전쟁 초반에 남한이 꼼짝 못 한 거지. 소련은 이북을 밀고 미국은 대한민국을 밀었지만, 전쟁은 한국 사람끼리 한 거야. 동족상잔이 벌어진 거지.” 평소 천도교를 믿고 있던 그는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12월 26일 서울에 도착한다.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참여도 하고 김구 선생을 도와 비서 역할을 하게 된다. 3년 동안 학생 비서로 있다 보니 당시의 역사를 소상히 알고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김구 선생이 사망한 후 공산당으로 몰기도 했는데 이는 이승만 박사와 정적 관계였기 때문이지, 사실이 아니었어요.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 때 조소왕 씨와 조병옥 씨가 경합했는데 나는 당시 조소왕 후보의 선전부 차장을 했어요. 조병옥 씨가 조소왕 씨를 빨갱이라고 했는데, 조소왕 씨는 연설하면서 ‘나는 빨갱이다! 내 가슴에 빨간 피가 흐르고 있다. 빨갱이 아니면 다 죽는다’고 역설해 3만 표를 얻어 당선되기도 했어요. 그때 조병옥 씨는 대통령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8천 표밖에 못 얻었어요.” 조소왕 씨는 삼균주의를 주창해 지지를 받았는데, 정치, 경제, 교육을 균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는 임시정부 사상이다. 봉건사회를 타파하고 민중이 주권을 가지며 균등사회를 건설하자는 사상으로 중국 손문의 삼민주의와 유사한 내용이다. “한국의 봉건체제에는 7개 신분계층이 있었어요. 첫째는 왕족, 둘째는 선비, 셋째는 농민, 넷째는 상인, 다섯째는 기술자, 여섯째는 일꾼, 마지막은 하인이었는데 이런 봉건제도에서는 한국이 발전할 수 없었어요. 이를 타파하고 균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게 임시정부 사상입니다.”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 온 그는 한양공과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양 야간중학교를 개설해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가르쳤는데 나중에는 5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남부민2·3동 일대는 산비탈로 피난민들이 보로바꾸(미군 물품 운반상자)로 지붕을 만들고 바닥에 깔아 생활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돈벌이에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 후 한양공대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야간 중학교는 무인가학교가 됐다. 그는 이 학생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송도중학교를 설립하고 입학금 없이 수업료만 반액으로 받아 학교를 운영했다. 송도중학교는 그 후 10여 년간 전국 성적 최우수학교가 되기도 했다. 김 원장은 이런 질곡의 역사를 거쳐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이제는 세계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섰다는 것이다. 올림픽에서부터 한류문화 열풍까지 세계적인 문화국가로서 그 위상이 높아졌지만, 급속한 발달로 사상적으로는 아직 부족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 스스로 문화민족으로서, 대한민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거기에 걸맞은 행동을 하자고 강조한다.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부산관광고등학교 설립 “부산관광고등학교는 세계인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아름답게 표현하며, 위대함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특히 농림축산식품부의 한식뷔페 연구학교로 지정돼 한식을 세계적인 메뉴로 개발·교육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먼저 눈으로 음미합니다. 그래서 음식이 정갈해야죠. 서양 사람들은 영양가를 봅니다. 중국 사람들은 맛이 있어야 해요. 반면에 한국 사람은 싸고 푸짐해야 합니다. 농림부의 보조금을 받아 이들이 한국에 왔을 때 그 기호에 맞게 만들어 내도록 연구하는 곳이 부산관광고등학교입니다.” 그는 이 학교 교장이 전국 관광고등학교 회장이라며 모범학교임을 자랑스러워한다. 국회 최장기 임시의장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사진] 15대 임시국회의장 당시 [사진] 기네스상 수여 김 문화원장은 15대 국회의원(자민련)에 당선된 후 최고령자로서 임시의장을 맡았다. 당시 한나라당에서 자민련의원 3명을 경찰을 통해 협박해 자당에 입당시킨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며 의장 선출을 보류하고 임시의장을 1개월 동안 계속했다. 결국,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의 총무 세 사람이 정치특위에서 각서를 받은 후 의장을 선출해 국회가 정식 개원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국회의원 당선자를 협박해 자기 당으로 입당시키는 폐단은 없어졌다고 한다. 그는 임시의장 최장기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으며, 교육분과위원회 활동으로 공·사립학교가 동등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법 개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굶는 사람 없는 세상 이어 가고자 30억여 원 땅 기부
사랑의 띠잇기는 회원들이 매년 1만 원 이상 회비를 낸다. 일반 사회단체에서도 기부금이 들어와 년 8억여 원으로 저소득층 가정을 돕고 어려운 노인들에게 안경, 보청기, 틀니 등을 후원한다. 학생들에게는 500벌의 교복과 책값 등도 지원하고, 500명의 어린이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산타4U’ 행사로 선물을 하기도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랑의 띠잇기가 영원히 지속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30억 원 상당의 토지를 이 단체에 기증했다. “내 죽은 후에도 서구의 가난한 사람 100세대를 계속 지원하라고 땅을 기증했어요. 앞으로 땅값이 오르면 50억 이상 될 수도 있는데 수익이 오르면 200세대 300세대로 늘려가기를 원합니다. 지정기탁으로 특수 법인을 만들어서 서구에 배고픈 사람이 없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서구만이라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라는 그는 오는 12월 11일 공무원을 비롯한 서구 관내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모여 고지대 어려운 이웃들에게 연탄 배달을 계획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부민동 사택 역사전시관 건립 건의 김 문화원장은 서구문화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다. 구덕공원에 부산농악문화원도 그가 주도해 건립했다. ‘아미농악’ 이사장에서 시작해 ‘부산농악’으로 발전시켜 전국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2번이나 받았다. 20여 년 동안 그는 부산농악 이사장을 맡아 부산문화를 지키는 데 앞장서 왔다. 그는 ‘바르게살기 서구협의회’를 만들어 중앙회 회장까지 역임했다. “서구문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게 남았어요. 6·25 전쟁 당시 부산 서구에 임시수도를 설치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부민동 사택에서 거처한 역사적 자료가 있어요. 서울 탈환 후 정부가 그 사택을 역사적 의미가 깊다며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이를 2층 역사박물관으로 재건축해 1층은 그 당시의 집기와 사진 등을 전시하고 2층은 영사관으로 만들어 6·25 당시의 뉴스와 북한의 남침 영상 등을 모아 상영한다면 청소년이나 외국 관광객들에게 훌륭한 역사교육장이 될 수 있어요.” 그는 사택 주변의 주택 4~5채를 매입해 관광버스 등이 주차할 수 있도록 만들면 초·중·고 학생뿐만 아니라 내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관람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최근 그는 박근혜 대통령께 건의서를 제출하고 시의정회 의장단을 통해서도 제안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고 한다. 관광산업 발전을 위한 제언 “관광산업은 볼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부산은 자연관광지 외는 볼거리가 부족해요. 이승만 대통령 사택 역사전시관도 그래서 제안하는 거야. 대한민국 전체도 마찬가지로 볼거리가 별로 없어요. 그런데 2천 년 전 신라에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문화가 있었어요. 이를 복원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어야 해요. 내가 경주 김씨로 신라종친연합회 총재를 맡고 있는데 경주에 9성이 본관을 두고 있어요. 이를 토대로 신라문화를 복원하기 위해 (사)신라문화선양회를 조직하고 이사장을 맡아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찾아갔었어요. 박 후보는 ‘부친(박정희 대통령)께서 신라문화 복원사업을 준비하다 돌아가셨다’며 오히려 자기를 도와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낙선하고 당대표 때 비서를 통해 공문을 보내왔어요. 이명박 대통령 재임 때 허가를 받으라고 해서 이 대통령 서명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번 정부에서 국무총리령으로 착수하게 된 거야. 1조 원을 들여서 2027년에 완공한다고 언론에 발표가 됐어요.” 그는 다른 문화는 대부분 강대국에 예속된 문화지만, 신라문화는 독립적인 문화라며 2천 년 전의 우수한 문화를 복원·발전시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세계적인 문화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태극기, 애국가 지키기’ 3守 운동가로 활약 “3수 운동은 우리가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국호는 대한민국,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로 지켜내자는 범민족적인 운동입니다.” 그는 2002년 제14회 아시아경기 대회 개회식 때 단일 남북선수단이 입장하면서 국기로 ‘한반도기’와 국가로 ‘아리랑’을 열창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한반도기는 1989년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에서 처음 제시됐으며, 1991년 일본 지바에서 개최된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처음 사용됐으며 당시 국호는 고려, 국가는 아리랑이 연주됐다. 그 후부터 1991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8·15민족통일대회,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일본 동계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2004년 아테네올림픽대회 등에서도 사용됐다. 이를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3守를 목표로 ‘대한민국 삼수운동 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는 통일 후에도 3守는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국방력이 상대방보다 월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는 우리도 이에 대응해 핵무장을 해야 평화를 유지하고 3수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앞날을 바라보며>라는 저서를 통해 3수 운동의 당위성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소망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 * 김허남 부산 서구문화원장 약력 –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 졸업
대담·전병열 문화관광저널 편집국장 / 사진·고경희 기자 newsone@newsone.co.kr |
[김허남 부산 서구문화원장 · 전 국회의원] “전 국민 대한민국·태극기·애국가 지키기 ‘3守 운동’ 매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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