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옛길 따라 걷고, 숲과 하늘을 품다
이명이 기자 lmy@newsone.co.kr
경상북도 서북쪽에 자리한 문경은 옛 선비들의 발걸음이 닿던 길목이자, 탄광의 검은 기억을 간직한 도시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경은 그 무엇보다 ‘자연’과 ‘체험’의 고장으로 진화하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단 하루, 혹은 짧은 주말만으로도 진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문경으로 떠나보자.
문경의 심장, ‘문경새재 도립공원’에서 시작하는 여정
문경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곳이 바로 문경새재 도립공원이다. ‘새들도 힘들게 넘는 고개’라는 의미를 담은 새재(鳥道)에는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제1관문부터 제3관문까지 이어지는 고갯길은 약 6.5km로, 도보로 걸으면 2~3시간이 소요된다. 길 곳곳에는 쉼터와 정자, 유서 깊은 비석이 세워져 있어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다.
이 고갯길은 단순한 등산로를 넘어선다. 사계절 각기 다른 매력을 품은 문경새재는 봄의 연둣빛 물결부터 겨울 설경까지 풍광이 뛰어나다. 특히 가을 단풍철이면 전국에서 수많은 사진 애호가와 등산객들이 몰려든다.
문경의 길 위에 피어난 문화의 향기, ‘옛길박물관’
한반도의 중심과 남쪽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 문경. 조선 시대부터 문화와 사람이 오가던 이곳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깃든 ‘길’이 있다. 조선팔도의 고갯길을 대표하는 문경새재(명승),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 하늘재, 차마고도를 떠올리게 하는 절경의 옛길 토끼비리(명승), 그리고 영남대로 상의 중심지였던 유곡역까지—문경의 옛길은 단순한 통행로를 넘어 역사와 문화를 품은 살아있는 유산이다.
이처럼 소중한 지역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문경시는 기존 문경새재박물관을 ‘옛길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문을 열었다.
옛길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을 진열하는 공간이 아니다. 옛 선비와 여행객들이 괴나리봇짐에 담았던 소박한 물건들, 과거시험길에 오르던 이들의 기록,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복식류 등 실감나는 유물들을 통해 조선시대 여행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역사 문화의 생생한 체험 공간이다.
문경의 옛길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걷는 살아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피어난 삶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공간, 옛길박물관.
과거의 숨결을 따라 걷고 싶은 이들에게 꼭 들러야 할 문화의 보고(寶庫)다.
자연의 품에서 배우고 쉬다, ‘문경새재 자연생태박물관’
자연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 그러나 문경새재에 들어서면, 그 말이 무색해진다.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 그리고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품은 이곳은 조용히 자연의 품을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에 자리한 문경새재 자연생태박물관은 문경의 생태자원과 자연환경을 보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종합 자연학습공간이다. 63,000㎡가 넘는 너른 부지와 친환경 목조건물로 지어진 이 박물관은 단순한 전시를 넘어 자연과 사람을 잇는 통로 역할을 한다.
1층은 체험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문경의 자연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영상관, 어린이들이 놀이와 학습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벅스 어드벤처, 국내 유일의 돌리네습지를 주제로 한 특별전시실, 그리고 4D 애니메이션 체험관과 포토존까지,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특히 인기다.
2층에 올라가면 문경의 생태와 자연사를 주제로 한 상설전시관이 펼쳐진다. 네 개의 존, 여덟 개의 주제로 구성된 이 공간에는 다양한 박제표본과 함께 생태 디오라마가 연출돼 있어, 자연을 눈앞에서 느낄 수 있다. 생태체험 교육실과 기획전시실도 마련돼 있어 계절별, 주제별 전시가 이어진다.
박물관 밖으로 나서면 또 하나의 즐거움이 기다린다. 야생화단지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며, 쉼터로 조성된 정자와 전통 도자기 가마인 망댕이 가마, 시원한 분수와 물레방아, 작은 폭포 등이 자연 속 힐링을 더해준다.
문경새재 자연생태박물관은 단순한 ‘관람 공간’이 아니다.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끼며, 자연과 가까워지는 곳. 자연의 품에서 배우고 쉬고 싶은 이들에게 문경새재는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있다.
흙에서 빚은 예술, 전통을 품다 ‘문경 도자기박물관’
도자기박물관은 문경새재 도립공원 입구에 위치해 있어 관광과 연계해 방문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단정한 2층 건물은 도자기의 정갈한 미학을 닮았다. 실내에는 전시실, 영상실, 특별전시실, 전시판매장, 학예연구실 등 관람과 체험, 연구가 어우러진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문경도자기는 특별하다. “순박한 심성이 그대로 배어 있어 색채와 형태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평가처럼, 과장 없이 절제된 미가 돋보인다. 조선 초의 분청사기와 백자 도요지가 널리 분포되어 있는 문경은 지금도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이 활동하고 있으며, 도예 명장 3인이 전통기술을 계승하고 있다. 이곳에 전시된 도자기들에는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한국 도예의 깊이가 오롯이 담겨 있다.
박물관 내부에는 문경 도자기의 역사와 흐름을 소개하는 영상실, 특별기획전시가 열리는 특별전시실, 도자 예술품을 직접 구입할 수 있는 전시판매장까지 마련돼 관람객의 오감을 만족시킨다. 아이들과 함께 들르기에 좋은 공간이며, 도자기에 관심 있는 여행자라면 한참을 머무르게 되는 장소다.
야외로 나서면 전통 가마터와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문경의 흙, 불, 사람, 시간이 함께 빚어낸 조형미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숨 쉬며 전통을 이어가는 문경 도자기박물관. 흙 한 줌에 담긴 백년의 시간을 만나고 싶다면, 문경의 이 조용한 공간을 걸어보길 권한다.
자연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문경의 새로운 명소 ‘문경에코월드’
문경에코월드는 기존의 문경석탄박물관과 가은오픈세트장에 에코타운과 야외체험시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더해 충청 이남 최대 규모의 테마파크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백두대간 생태자원을 기반으로 생태, 녹색에너지, 환경을 주제로 조성된 이곳은 영상문화 콘텐츠와 융합해 모든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친환경 복합문화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1999년 개관한 문경석탄박물관은 국내 제2의 탄전이었던 문경의 산업 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6,900여 점의 광물과 광산 장비를 비롯해 실제 갱도 체험이 가능한 거미열차, 은성갱도 실감체험관, 광부들의 생활을 재현한 사택촌과 야외전시장 등을 통해 석탄산업의 역사와 광부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은오픈세트장은 고구려와 신라 시대의 궁궐과 성곽, 마을과 시장 등을 고증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재현한 국내 대표 사극 촬영지다. 연개소문, 선덕여왕, 대왕세종, 뿌리깊은 나무, 군도 등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고구려 벽화의 색감을 적용해 고대의 기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문경에코월드는 자연과 역사, 산업과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 테마공간으로, 문경의 새로운 관광 명소이자 교육과 체험이 공존하는 살아있는 현장이다.
의병의 길을 따라 걷다, ‘운강이강년기념관’
문경의 푸른 산자락 아래,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는 역사 이야기를 전하는 곳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빛나는 전공을 세운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운강기념관이다.
운강기념관은 2002년 4월 개관 이후, 선생의 애국정신을 알리는 교육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구국의 일념으로 무장한 그의 삶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닌, 오늘날에도 울림을 주는 민족정신의 상징이다. 이곳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역사를 생생히 느끼게 하는 산 교육장이자,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장소다.
기념관은 유물전시관, 사당,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이강년 선생의 의병 활동 연보와 함께 교지, 간찰, 만사 등 귀중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에는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조용한 참배와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기념관이 자리한 주변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문경의 역사와 생태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단순한 전시관을 넘어, 관광과 교육, 휴식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문경을 찾는 여행자라면, 역사의 숨결이 깃든 이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보자. 고난의 시대를 꿋꿋이 견뎌낸 민족의 정신이 지금도 이곳에서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자연 속을 누비는 재미, 문경생태미로공원
푸른 숲길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미로 속으로 들어선다.
문경새재의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 문경생태미로공원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이색 생태 관광지다.
기존 문경새재 자생식물원 자리에 조성된 이 공원은 자연 그대로의 생태환경을 바탕으로 도자기, 연인, 돌, 생태를 주제로 한 4개의 테마 미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각각의 미로는 문경의 상징성과 자연의 정서를 담고 있어, 단순한 놀이 공간을 넘어 자연과 문화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탄생했다.
미로를 빠져나오면 탁 트인 전망대와 연못, 산책로가 기다리고 있어 여유롭게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다양한 식생과 계절별 풍경이 어우러진 이곳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제격이다.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장난치듯 놀고 싶을 때, 문경생태미로공원에서 숲의 길을 따라 작은 모험을 떠나보자.
산 속 숨은 붉은 땅의 신비, 문경돌리네습지
깊은 산속, 석회암 지대 한가운데 뜻밖의 생명 공간이 펼쳐진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굴봉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문경돌리네습지는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내륙 산지형 석회암 습지다.
‘돌리네’는 석회암 지대의 탄산칼슘이 빗물이나 지하수에 녹아 생긴 접시 모양의 웅덩이로, 일반적으로는 물이 고이지 않고 배수가 잘 돼 습지가 형성되기 어렵다. 하지만 문경의 굴곡진 산지 한가운데 자리한 이 습지는 예외다.
문경돌리네습지는 웅덩이 바닥에 테라로사라 불리는 붉은 석회암 풍화토양이 얇게 쌓여 불투수층을 형성하면서, 그 위로 수분이 머물 수 있는 독특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다른 돌리네 지역과 달리 물이 고이고, 다양한 식생이 자라나는 습지 생태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곳은 단순한 자연경관을 넘어 지형·지질학적으로도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로, 국내외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생태 자원이다.
가벼운 트레킹 코스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첩첩한 산봉우리 사이에 펼쳐진 작은 생명의 터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경돌리네습지는 자연의 오랜 시간과 지질 작용이 빚어낸 신비로운 풍경이자, 문경이 품은 또 하나의 보석 같은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