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전씨의 후예로서 후진들의 자부심이 될 수 있도록 정진해 나가겠다”
“담양전씨의 DNA에는 실패에 굴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인내심, 굳건한 신념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우물을 10년만 파라’는 옛말을 가슴에 새기고 굉장히 힘든 길을 최선을 다해 걸었습니다. 그 결과 정말 10년 만에 쾌거를 이뤘습니다.”
3전 4기로 당선의 첫 영광을 안았으며, 특정 정당이 수십 년간 독점해온 부산 북·강서갑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한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사진)의 소감이다.
그는 또 “담양전씨 후예로서 선조의 숭고한 정신에 감사하며, 담양전씨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의정 활동 매 순간마다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 때로는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생명을 걸고 도를 지키려는 신념을 가져라. 오직 의(義)만 따르라’는 담양전씨의 가훈을 되새기며, 공정하고 올바른 신념을 잃지 않고 국민과 이웃에게 힘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다”라고 덧붙인다. 담양전씨의 가훈은 간재 선생의 문집에 있는 말이다.
전 의원은 경남 의령군 용덕면 용소리 출신으로 경은 후 27세다. 아버지 용판(溶判 · 호적 判介)과 어머니 최(慶州) 순임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이다. 그는 8세 때 부산 북구 구포동으로 이주해 만덕초·덕천중·구덕고를 졸업하고 동국대 · 대학원(정치학 석사)을 졸업했다. 전 의원은 현재 부산 북구에서 아내 최(江陵) 혜진과 두 딸 서영·채영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는 지난 5월 2일 오후 2시 촌음을 다투는 일정임에도 본지의 인터뷰 요청에 휴일을 택해 시간을 내줬다.
뿌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과제
전 의원은 뿌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신의 뿌리를 아는 일은 나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가문의 역사 속에서 계승되어온 정신을 깨닫고 자신의 근본을 확립하는 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듯이 역사를 잊은 집안에 그 집안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세상만사가 변하고 있지만, 변함없이 지켜야 할 가치도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뿌리가 아닐까요. 집안의 역사는 굳건하게 지켜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전 의원은 우연히라도 담양전씨를 만나면 혈족의 정을 느낀다며 ‘선조가 누구이며 몇 대 손이냐’고 물어보면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사람이 없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유교적 가치 중에도 새롭게 조명 받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가령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인가’하는 문제는 유교가 끊임없이 찾고자 했던 답이 아니겠습니까. 개인화·파편화되고 철저하게 고립돼 가는 요즘 세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문명의 원천이 유교적 가치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유교 문화를 구닥다리 문화로만 취급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조명하고 정립할 가치가 있다고 역설한다. 이어 익명성이 공동체 문화를 훼손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소개한다. 예컨대 공동체 사회에서는 불량한 행위를 하면 어느 집, 누구 아들이라는 것이 즉시 알려져 가문을 욕되게 한다며 어른들의 질책으로 훈계가 되기도 하는데, 개인화된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가치가 상실되고 익명성으로 인해 사건사고가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가문이나 종친회는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추석 명절 때는 빠뜨리지 않고 조상 벌초에 참여한다는 전 의원은 담양 시조 묘역에도 개인적으로 몇 번 참배를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족보의 가치에 대해서도 큰 의의를 두고 있다고 답했다.
“족보는 선조의 사적과 혈통이 체계적으로 기록·정리돼 오랜 기간 계승돼 온 가문의 고유 문화유산입니다. 단순히 집안의 계보를 나열한 기록물이 아니라 가문의 전통을 서술한 역사서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족보를 통해 ‘숭조 사상’을 고양하고 선조의 위업을 계승·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역사에서 배제된 내용까지 아우르는 귀중한 자료로 대대손손 보존·계승해 나가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전 의원은 자신의 족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그 편리성과 활용성에 대해 탄복했다며 그 기획력과 대종회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우리 대종회는 디지털 세대에 부응해 인터넷 족보를 발간·보유하고 있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어린이들까지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손쉽게 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한글로 병행해 족보의 가치를 가일층 드높였다고 생각합니다. 족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젊은 후손들에게 족보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터넷 족보를 선도적으로 개발한 대종회 관계자들께 종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전 의원은 종친회에 대해서도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며 역할과 발전 방안에 대해서 견해를 밝혔다.
“종친회는 가문의 위업과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종원들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고 숭조 정신 함양과 후잉 양성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종친회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 젊은 종친회가 돼야 합니다. 우리 종친회는 청장년회가 조직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선도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종친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저 역시 청장년회 회원으로서 소임을 다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연민의 정치를 구현하다
전 의원의 정치 철학은 연민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연민을 ‘나 아닌 타인의 슬픔, 고통, 분노, 아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정의한다.
“정치를 가슴에 품으면서 다짐했던 것이 있습니다. 똑똑한 정치, 잘난 정치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정치, 따뜻한 이웃이 되는 정치를 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게 유독 가혹합니다. 그래서 정치는 더욱 힘들지만, 어려운 이웃들의 버팀목이 돼 줘야 합니다. ‘따뜻한 이웃공동체’가 제가 꿈꾸는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는 부처님의 ‘자비’와 공자님의 ‘인(仁)’, 예수님의 ‘사랑’, 마호메트의 ‘평화’는 사람의 도리를 일깨운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듬고, 억울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정치,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정치로 따뜻한 이웃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정의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평소 가장 존경하던 선생님이 전교조 부산지부 결성식에서 축시를 낭송했다는 이유로 파면을 당하고, 복직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어린 마음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느끼고 이런 역사들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생각을 품고서도 사범대학에 진학해 역사 교사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동국대에서 제1회 ‘참교육자상’ 시상식이 있었다. 그 시상식 수상자가 고교시절 가장 존경하던 은사님이셨는데, 그분은 복직투쟁 중 발병한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대신 사모님이 참석하셨다. 그런데 서울 경찰청에서 그 행사를 원천봉쇄하고자 경찰력을 투입했고, 그를 포함한 학생들이 그에 맞서 싸우게 된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교사보다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는 정치가 더 큰 힘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는 결국 교사 임용시험도 포기하고 정치학을 배우기 위해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 전 의원이 본격적으로 정친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부터다.
“1999년 저는 국회에 인턴직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어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종로구 지역 국회의원이셨는데 부산으로 내려가신다는 이야기를 선배로부터 들었어요. 노 전 대통령님은 5공 청문회 스타이자 인권 변호사로서 어려운 분들을 무료 변론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평소에 훌륭한 정치인으로 존경하고 있었어요. 그분이 제가 초중고를 나온 북구에서 출마하신다는 데 자원봉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 뵜어요. 그때 하시는 말씀이 ‘쉽지 않은데 진짜 할 거냐?’ 라고 딱 한마디 하셨어요. 저는 흔쾌히 ‘의원님을 도와서 부산을 바꾸는데 힘을 보태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래. 가자’ 이렇게 해서 인연이 됐습니다. 그때 저는 29살이었어요.”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길은 험난했다. 물론 꽃길만 있을 것이란 생각은 애초 없었다. 노 전 대통령 당시 청와대 행정관, 제2부속실장을 역임한 그는 2006년 부산 북구청장에 출마해 낙선(득표율 32.6%) 한다. 2008년 부산 북강서갑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지만, 또 고배(38.6%)를 마신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2012년 다시 국회의원에 도전한다. 48% 가까운 득표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또다시 석패하고 만다. 그러나 도전을 거듭할수록 득표율은 올라가 차기에는 당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주목을 받는다. 드디어 2016년 3전 4기로 10년 만에 쾌거를 올린다. 그의 불굴의 의지가 일군 결실이다.
“저는 실패의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 정치 4수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쓰라린 패배감으로 방황도 했고, 좌절도 했지만, 이 모든 과정이 진짜 제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떨어졌지만, 선거 때만 다가오면 저의 심장은 요동쳤습니다. 낙선을 거듭할수록 불굴의 의지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를 뛰게 하는 건 결국 정치였고 이웃들 삶 속에 들어가 있는 제 삶이 편했기에 10년을 굳건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오히려 다시 못 올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면서 한 톨의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 또한 힘든 시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전 의원은 정치에서 실패는 오히려 자산이 됐다고 토로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가능한 실패를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자신은 실패를 통해서 배운 것이 당선의 비결이었다고 소개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 초판 추천사에서 “청와대에서 5년을 함께 근무했다”며 “한 정부에서 부서만 바꿔 3번을 취직했다는 것은 한 번 나가면 두 번 다시 들어오기 어려운 청와대 생리상 흔치 않는 일이다. 그의 소문난 성실함과 겸손함 때문에 가능했다”고 소개했었다.
그는 정친인으로서의 포부도 밝혔다.
“국회의원이 되고 가장 뿌듯할 때는 지역 주민들께서 ‘전재수는 국회의원 되기 전이나 되고 난 후에도 변함이 없다. 다른 정치인과는 좀 다르다’라고 말씀해 주실 때입니다. 앞으로도 한결같은 자세와 겸손한 태도로 따뜻한 북구, 따뜻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는 정치인이 되겠습니다.”
전 의원은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른 BTS(방탄소년단)의 막내 田정국이 세계적인 스타로 대한민국을 빛내고 있는데, 그가 자신의 지역구인 북구 만덕동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또한, 전국에서 20만 명에 불과한 담양전씨가 국회의원을 3명(전봉민(무소속)·전용기(더불어민주당))이나 배출했다는 것은 크나큰 음덕(蔭德) 덕분으로 생각하며 늘 보은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끝으로 전 의원에게 젊은 청춘들(MZ세대)을 위해서 한 말씀해달라고 했다.
“자크 라캉(프랑스 철학자)은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습니다. 사회나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마치 내가 원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오롯이 ‘나 자신’으로 살아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의 꿈을 향해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덧붙인다면 제사나 벌초를 구닥다리 문화로 치부하지 말고 공동체적 삶을 위해, 집안의 역사를 이해하고 전통에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전병열 편집인·이명이 문화관광저널 기자
- 본 기사는 담양전씨 종보(21-5)에 게재된 내용임
❖ 전재수 국회의원 의정 약력 ❖
제20대·21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부산 북구·강서구 갑)·국회 정무위원회 위원·국회 윤리특별위원회 간사·더불어민주당 국가균형발전특별위원회 부위원장·前 더불어민주당 원내선임부대표·前 더불어민주당 부산광역시당 위원장·前 청와대 제 2부속실장·前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실 행정관·前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정책보좌관
<수상> 더불어민주당 국정감사 우수의원(3회), 2019 대한민국 의정대상, 2016 대한민국 혁신경영대상 정치신인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