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와 필기구를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된 것 같아요”
대학생 김다희(22)씨는 강의 시간이나 공부할 때 스마트 태블릿을 이용한다. 온라인으로 전환된 강의가 많은 요즘, 교수님이 보여주는 자료화면 등을 캡쳐해 필기 앱에 붙여넣기만 하면 나중에 강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떠올리기도 쉽다. 손으로 하는 것보다 속도도 빠르고 이동할 때도 태블릿 하나면 되다보니 여러모로 편리하다.
얼마전 휴대전화 기기를 변경한 오현수(63)씨는 가입 문서가 종이가 아니라 태블릿이라는 점이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신용카드를 개설 신청을 할 때도 모바일로 가능하다는 것을 최근에 처음 알았다. 신청 사본을 종이가 아닌 메시지로 받아본다는 것도 간편했다. 그는 “문서를 보관한다고 해도 자리만 차지할 뿐이니, 간편하게 변화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환경을 위한 종이없는 세상
페이퍼리스 운동은 소모되는 종이를 줄이는 환경적인 측면에서 제시된 것이 시초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종이 및 판지 소비량은 2017년 191.4kg로 세계 10위에 기록될 정도로 사용량이 많은 편이다.
그 중 영수증은 받자마자 버려지는 양이 전체 60%다. 환경부에 따르면 연간 영수증은 310억건 발행되고, 이를 위해 33만 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00cc 승용차 2만1000대가 배출하는 양과 같다.
많은 회사에서 전자결재를 시행하고 있지만, 회의나 업무보고, 자료보전 등의 이유로 A4용지를 사용하는 비율은 여전히 높다. 학생들 역시 레포트 제출을 위해 A4용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런 A4용지 1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 10리터가 필요하며 생산과정에서 2.88g의 탄소를 발생시킨다.
문제는 종이 영수증과 A4용지뿐만 아니라, 택배상자, 포장상자, 내부충전재 등 다양한 종이 쓰레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든 종이를 아예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인 움직임이 동반되고 있는 것이다.
페이퍼리스 사회로 가는 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가 지난달 10일부터 시행하고 있는 전자문서 및 전자거래 기본법(이하 개정법)은 페이퍼리스 사회로의 진입을 앞당기고 있다.
개정법은 전자문서의 법적 효력 및 서면요건 명확화, 종이문서 폐기 근거 마련, 온라인 등기우편 활성화를 위한 공인전자문서중계자 제도 개선을 반영한다. ▲전자문서도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종이문서와 동일한 효력 발휘 ▲전자문서를 공인전자문서센터에 보관하는 경우 종이문서 폐기 가능 ▲공인전자문서중계자 진입요건 완화 등을 골자로 한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2023년까지 약 1조1000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얻을 수 있고, 2조1000억원 규모의 신규시장 창출 등이 예상된다.
민간기업의 페이퍼리스 움직임도 발빠르다.
카카오페이는 지난달 16일, 각종 고지서나 증명서 등을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종이가 필요없는 ‘페이퍼리스’ 사회를 만들겠다고 제시했다. 카카오페이는 이미 지난 2016년 2월, ‘카카오페이 청구서’를 출시해, 각종 생활 요금 청구서를 카카오톡으로 받고 납부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더해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서비스는 전자문서를 받는 것 뿐아니라 일반 개인이 정부나 기업 등 기관에 각종 증명서를 낼 수 있는 사업모델이다.
은행권에서도 페이퍼리스 사회를 향해 노력 중이다.
NH농협은행은 공무원 협약대출 시, 제출 서류 없이 블록체인 기반의 자동 대출 자격정보검증시스템을 구축한다. 오는 8월 말부터 종이 융자추천서 발급·제출 없이 은행에서 즉시 대출이 가능해진다. 미래에셋생명도 올 하반기 종이없는 보험사를 목표로 고객서비스 본부를 중심으로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페이퍼리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앞으로 보험가입에서 상담, 대출 등 모든 고객업무에서 종이가 사라질 예정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원격수업이 보편화되면서 교육계에서도 페이퍼리스 바람이 불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교사ㆍ학생 등이 디지털 교과서를 내려받은 건수가 2019년 3~10월 396만7027건에서 지난해 같은 기간 1612만4621건으로 3.1배 늘었다.
주요 대기업들은 온라인 기반 보고·결재 시스템을 구축하고 회의실 등에 전자 칠판을 도입한 지 오래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등을 인쇄물이 아닌 파일로 제작해 공개하는 곳도 많다. 건설현장에서는 종이 도면 대신 태블릿PC로 도면·기술정보 등을 확인하고 있다.
페이퍼리스의 그늘
하지만 IT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ㆍ저소득층ㆍ외국인 등 이른바 디지털 소외계층은 혜택을 누리기보다는 각종 금융거래나 경제활동에 제약을 받는 등 불편이 커질 수 있다.
개인정보 유출과 같은 보안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종이에 기록된 정보는 물리적으로 유출을 막을 수 있고 파기를 하면 정보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전자 매체에 저장된 정보는 재생산되기 쉽다는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이 문서 위주의 관행도 넘어야 할 장벽이다. 일부 매장에선 소비자가 전자영수증을 제시해 환불하는 절차가 까다롭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대형 병원에서는 모바일 앱으로 처방전을 전송한느 전자처방전을 도입했지만 환자·약국들이 시스템 운영 여부를 인지하지 못하다보니 이용률이 저조한 편이다.
하지만 페이퍼시대로의 움직임은 이미 피할 수 없다.
종이에 글을 쓰지 않아도 디지털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시대는 이미 도래했고,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아두던 문서를 협업툴 프로그램과 전재결재 시스템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우편함에 꽂혀있던 광고 전단지는 이제 마트 앱안에서 만날 수 있고, 지폐나 카드 없이 앱으로 간편하게 결제할 수 있다. 탄소발생을 저감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종이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때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