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에 사는 이모씨(34세)는 자영업으로 월 200만 원 정도의 소득을 가지고 있지만, 중고차 할부로 BMW를 타고 있다. 주차장도 없는 빌라에 월세로 살고 있지만, 이씨는 “타고 싶은 차를 타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학생 서모씨(22세)는 알바를 하는 목적이 명품을 사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100만 원이 넘는 운동화를 샀고, 작년 겨울에는 70만 원 상당의 지갑을 샀지만, 서씨의 위시리스트는 끝없이 채워지고 지워지길 반복하고 있다.
코로나19(COVID-19)로 전세계적으로 불황이 전망되고 있지만 소비양극화는 더 극심해지고 있는 요즘이다.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비양극화란 부유층이 고급 사치재화를 소비하고 저소득계층이 저가 생필품을 소비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최근의 소비양극화는 양상이 다르다. 소득이 적은 사람도 몇 달치 급여를 모아 사치품을 구매한다. 삼각김밥과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더라도 몇 달치 월급을 모아 명품백을 사고, 월급의 절반을 외제차 할부금을 갚는데 쓰기도 한다. 이런 소비를 젊은 세대들은 ‘플렉스’라고 부르고 있다.
‘플렉스(Flex)’는 원래 ‘운동 등으로 몸을 풀다’라는 뜻이지만, ‘부를 과시하다’, ‘비싼 물건을 사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90년대 미국에서 빈곤층 출신인 흑인 래퍼들이 성공해서 번 돈으로 부를 과시할 때 ‘플렉스’를 썼던 게 시초였고, 한국에서는 래퍼 염따가 유튜브 방송으로 하루에 4,000만 원을 소비하는 모습 등을 공개하며 “플렉스 해버렸지 뭐야”라는 말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10~30대들은 ‘오늘도 플렉스 했다’, ‘플렉스 인증’이라는 표현을 쓰며, 유튜브에 플렉스를 검색하면 수많은 인증 영상이 나온다. 억 단위의 명품을 한꺼번에 쇼핑하고 박스를 개봉하는 동영상은 높은 조회수를 자랑한다. 구독자들은 “화끈하게 명품을 쇼핑하는 모습에서 시원한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말한다.
너도나도 플렉스하는 문화는 명품 소비의 급증과 이어진다. 벤츠는 지난 한해에만 국내 시장에서 7만여 대의 차량을 판매하며 4년 연속 국내 수입차 판매 1위에 올랐고, 코로나19로 경기가 악화된 올해 1분기조차 판매량은 전년대비 14.7% 늘었다. 경기가 얼어붙은 백화점의 매출은 샤넬·루이비통·에르메스와 같은 해외패션 명품이 견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자원통상부에 따르면 지난해 백화점 3사(롯데·신세계·현대)의 총 매출 증가율은 마이너스를 기록했지만 명품은 20%대를 기록하며 가장 높은 점유율을 나타냈다.
특히 백화점 명품관은 주말이면 쇼핑은커녕 입장조차 쉽지 않다. 입구에는 원활한 쇼핑을 위해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사람들은 긴 줄을 서서 대기하곤 한다. 때때로 많게는 1시간 넘게 기다리는 경우도 있고, 일부 매장에서는 맛집 웨이팅 시스템처럼 입장 차례가 오면 연락을 주는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겨우 매장에 입장해도 원하는 제품이 없는 경우는 허다하다. 어느 브랜드를 망라하고 인기 있는 제품들은 당일에 구매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재입고 일정도 따로 없어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명동, 홍대를 비롯 전국 유명 상권에서 목 좋은 상가도 공실이 되고 임대문의가 붙는 상황과 비교하면 대조적이기 그지 없다.
인기 제품은 수백만 원의 높은 가격에도 입고된 당일에 거의 소진된다. 일부는 판매되자마자 중고시장에 원래 가격의 두 배로 되 팔리기도 한다.
한국에서 명품이 잘 팔리자 명품 업체들은 가격을 계속 인상하고 있다. 지난 3월 루이비통코리아는 전체 제품 가격을 3~4% 인상했고, 샤넬은 지난해 10월에 인기 가방 제품을 거의 100만 원 인상했으며, 디올은 2019년 4번이나 가격을 올렸다. 소비자들은 이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명품은 오늘이 가장 저렴하다”며, “가격이 오르기 전에 사서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이른바 베블런 효과다. 가격이 오르는 데도 과시욕이나 허영심 때문에 수요가 줄어들지 않은 현상으로 인해 명품업체의 가격 인상은 판매 전략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와 다른 점은 일부 부유층에 국한됐던 소비행태가 전 계층으로 확산된 것이다.
특히 과거와 달라진 건 10대 청소년들의 명품 사용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주 찾는 학원가, 카페, 놀이동산, 학교 인근에만 가도 알만한 명품 브랜드를 착용하고 있는 10대 청소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명품 백팩의 메쉬포켓에 샤넬같은 명품 화장품을 아무렇지 않게 넣어 다니기도 하고, 에르메스 지갑에 발렌시아가 운동화는 흔하디흔한 학생 아이템 중 하나가 되어버린 듯하다.
지난해 12월에 발표된 스마트학생복의 10대 명품소비 설문조사는 이 같은 현상을 반증한다. 설문조사에 응한 총 358명의 10대 중 명품을 구매한 적이 있는 비율은 56.4%에 달했고, 명품을 구매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평소 명품 브랜드에 관심이 많아서’가 27.4%, ‘친구들이 가지고 있으니 소외당하기 싫어서’가 13.1%가 1, 2위 답변을 차지했다. 명품을 구매하는 방법으로는 ‘부모님이 사준다’가 39.1%로 가장 많았고, ‘내 용돈을 모아 구매한다’가 25.7%로 그 다음을 이었다.
경제적 능력이 대부분 없는 청소년들은 주로 중고시장을 통해 명품을 되팔기 하며 차액을 취득하는 방법으로 다음 명품을 구매하는 기반을 만들기도 한다. 줄을 서서 한정판 스니커즈 등을 구매해 정가보다 비싸게 되팔고, 자신이 소유한 명품을 깨끗한 상태로 착용한 뒤 품귀현상이 있을 때 정가보다 높은 금액으로 판매하는 등이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시장 속에서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18년 부산에서는 당시 17살이던 고등학생 A군이 학교 후배들을 협박해 휴대전화와 신분증을 빼앗아 이를 이용해 중고사이트에 명품 의류를 판다고 허위매물을 올려 공갈·절도·사기로 입건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연천에서는 명품 의류나 골프채 등을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판다고 속여 수천만 원을 가로챈 10대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명품 의류를 직접 절도하는 사건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명품을 갖고 다니는 학생이 늘면서 교내 절도나 도난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 CCTV 설치를 고민하고 있으며, 명품 매장에서 직접 훔쳐 달아나 입건된 사건도 허다하다.
명품 소비는 아무리 늘어나도 우리 사회를 순환시키지 못한다. 수입사치재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재화가 아니고, 명품업체의 고용 창출과 사회 기여는 매우 미미한 수준이라, 임금의 증가나 고용을 창출하는 내수 경제의 선순환에는 영향을 거의 주지 못한다.
소확행·욜로와 같은 맥락으로 자리 잡고 있는 플렉스(flex)이지만, 뒤에는 플렉스 소비문화를 조장한 일부 연예인과 인플루언서 등이 얽혀있다. 10대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돌에게 명품브랜드가 직접 협찬하고, 아이돌이 착용한 명품 제품은 ‘공항패션’, ‘무대의상’ 등으로 다시 소개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경제침체가 우려되는 지금, 돈의 가치는 중요하다. 어쩌면 자존감은 일시적이다. 우리의 플렉스가 만족을 넘어선 의미 있는 행동의 결과가 되는 것이 필요한 때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