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지난 6월 15일 일반에 공개한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6월 29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해외문화홍보원이 운영하는 코리아넷 스튜디오에서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군함도 전시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특별 대담이 열렸다. 방송인 정재환 씨가 진행하고 한일 관계 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와 소설 ‘군함도’ 저자인 한수산 소설가가 대담했다.
호사카 교수는 이날 미국 외교 전문지 ‘더 디플러맷(The Diplomat)에 칼럼으로 소개된 내용을 주제로 대담했다. 다음은 이를 요약한 글이다.
일본은 2015년 7월 나가사키(長崎) 군함도 등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군데’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23군데 중 7군데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연행 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린 시설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이 시설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데 반대했다. 이에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징용의 사실을 적절하게 전시하겠다고 약속해 한국 측은 이 시설들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동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2년 이내에 조선인 강제징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시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거의 5년이 지난 올해 6월 15일 도쿄 신주쿠(新宿)구에 자리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공개했다. 이 센터는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한다.
문제는 나가사키시 소재 하시마 섬(端島=군함도) 탄광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당시 주민들의 증언 등이 전시・소개됐다는 것이다. 호사카 교수는 이 전시의 의도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징용했지만, 그것은 합법이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전쟁 시 같은 비상사태에서는 국민들을 강제동원하는 것은 국제법에서도 인정된다는 논리를 일본 측이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도 일본 국적자였으니 일본법에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고 강변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을 가졌지만, 일본인과 같은 법적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조선과 중국, 대만 그리고 일본은 서로 다른 법적 구역으로 차별을 받고 있었다. 예컨대 조선인 등 외지인들에게는 선거권이 없었으며 조선인이나 중국인, 대만인들에는 일본국민으로서 의무만을 요구했고 권리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일제 차별정책의 핵심이었다.
일제는 탄광이라는 가장 힘든 노동에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등 전쟁포로들을 동원했다. 미국인 포로는 탄광 갱도로 들어가서 일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자해하며 갱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고 증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탄광노동을 하려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죄수들을 동원한 역사가 있다. 규슈의 미이케(三池) 탄광 등에서는 초기에 무기징역 이상의 판결이 확정된 죄수들을 탄광에 투입했다. 죄수들은 비인간적인 대우에 항의해 수차례 탄광에서 폭동을 일으키자 관리인들은 이들을 폭행, 살해하는 등 상당한 인권침해로 물의가 일어났다. 이후 탄광회사들은 죄수들의 탄광노동이 대부분 중지되자 극빈층을 모집했으나 그도 여의치 않자 조선인 등 식민지인들과 전쟁포로들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일본인을 대신해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전쟁포로 등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들은 강제노역으로 약 70%가 도주했다. 조선인들이 도주할 경우 이들의 저축은 모두 회사가 가로챘다. 일본인들은 저축통장과 도장을 본인이 갖고 있었으나 조선인들의 통장과 도장은 모두 감독관이 갖고 있어 도주나 중도퇴직 시는 모두 회사로 회수됐다.
하시마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18km 이상 헤엄쳐야 하는데 도주하다가 익사한 사람들이 많았다. 군함도에서 감독관을 지낸 고사코 마사유키(小迫正行) 씨는 1973년 10월 25일 아사히신문 나가사키(長崎)판 인터뷰를 통해 “나도 조선에 모집하러 갔고 강제적으로 조선인들을 연행했다…. 전쟁 시 탄광에서는 군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든 노동을 시켰다. 도주하다 바다에서 익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해서 패전했을 때는 먼저 비밀리에 중국인, 대만인과 조선인을 감독한 사람들을 섬에서 피신시켰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번에 일반에 공개된 정보센터에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증언만 전시됐다. 아버지가 당시 하시마섬 탄광에서 감독관으로 일했다는 재일 조선인 2세는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손가락질로 ‘저건 조선인이야’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감독관인 조선인은 당시 일본으로 본적을 옮겨 일본인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조선인이라도 일본인 대우를 받은 사람 후손의 증언을 전시하는 것 자체가 역사 왜곡 행위다.
일본은 하시마섬에서 강제노역으로 심하게 차별을 받았다는 수많은 조선인들의 증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 정부가 올해 도쿄에 정보센터를 연 이유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는 2020년 7월 개최될 예정이었던 도쿄올림픽 때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서 도쿄에 문을 연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현재 한일 간 대립하고 있는 강제 징용 판결 문제를 일본 측에 유리하게 만들 목적으로 이번 정보센터를 개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무리 왜곡해도 역사적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일본은 역사 왜곡으로 국가적 위상을 계속 떨어뜨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라고 칼럼을 마무리 했다.
과거 잘못된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없이 왜곡된 역사로 일관하는 일본의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면 지금의 일본이 왜 점점 고립되고 퇴보하는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명이 기자 lmy@newsone.co.kr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습니다”
군함도는 원래 무인도였다. 크기는 야구장 2개 크기정도 크기밖에 되지않는 자그마한 섬이다.
1810년 이 섬에서 석탄이 발견되면서 당시 일본의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미쓰비시사가 1890년 이 섬을 매입하고 석탄 채굴을 시작했다.
바다 위의 작은 섬에서 안정적으로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섬 주위에 많은 시멘트를 퍼부어 섬의 면적을 최대한 넓혔다. 그리고 많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 1916년 일본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아파트를 건설하고, 1927년 극장도 설립하면서 이 작은 섬은 점점 군함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광적인 전쟁으로 군인과 노동자는 더욱더 필요해졌고 그 수요를 강제징용으로 채워나갔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된 배경이다. 1943년~ 1945년 약 800명의 조선인 광부들이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군함도 석탄은 매우 품질이 좋았는데 이러한 질 좋은 석탄을 케기 위해서는 지하 1천m 이상을 파 내려가야 했다. 깊이 내려갈수록 경사는 급해져 60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몸을 묶고 좁은 공간에서 굉장히 힘들게 일했다. 갱도에 들어갈 수 있는 체구가 작은 아직 신체적으로 다 성장하지 못한 어린 학생도 동원됐다. 깊이로는 이미 바닷속이라 스며들어 오는 바닷물에 매일 노출되다 보니 피부는 짓무르고, 갱내는 온도가 40도가 넘고, 가스가 차 폭발의 위험도 있었다. 제대로 된 화장실 시설도 없어 가스와 분비물의 냄새가 뒤범벅된 말 그대로 막장이었다. 근무환경도 열악해 2교대로 12시간씩 일했다. 어떤 때는 8시간씩 2번, 16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물론 쉴 수도 없고 심한 매질에 시달렸다. 이러한 환경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배고픔이었다. 도망은 어림도 없다.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섬으로 파도가 심하고 어쩌다 탈출을 했다고 해도 나가사키에 닿으면 현장에서 맞아 죽거나 엄청난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나가사키 해안에 가면 작은 묘역이 있다. 군함도에서 탈출하다 익사한 조선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런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낸 조선인 광부들이 갑자기 섬 밖으로 보내지는데 바로 원자 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였다. 원폭으로 섬 일대가 정전으로 해저탄광에서 작업을 못하게 되니 원폭 사후 처리를 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다. 결국 방사능까지 피폭을 당하게 된다.
이런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는 군함도가 2015년 일본 메이지유신 시대의 산업혁명 시설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러나 강제동원에 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대상 기간도 1850~1910년으로 한정해 놓고 있다. 전쟁이 한참이던 1940년대를 숨기기 위한 꼼수로 보인다. 또 일본은 군함도를 일본 근대화의 유적지로서 관광지로 개발하고 일본 최초의 아파트, 근대적 최첨단 단지 이러한 화려한 유적지로만 홍보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우리나라의 반대에 부딪혀 “강제 노동이 있었다”라고 적시하기로 했지만 이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세계 유산 등재될 때 “군함도 전체 시기의 역사를 말해야 한다. 강제 징용의 역사가 있었음을 밝혀야 한다. 약속이행과 관련된 경과 보고서를 2017년 12월까지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사토 쿠니 유네스코 일본대사도 분명히 “1940년대에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 하에서 노역을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자신들이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직시하는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일본이 자랑하고 싶은, 기억하고 싶은 근대화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행되었던 폭력의 모습도 역시 기억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소녀상에 새겨진 글씨로 마무리한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습니다.”
<자료 : 유튜브 ‘[군함도] 최태성 강사 역사강의(2017.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