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키트·화장품·빨래까지, 바야흐로 구독의 시대
직장인 A씨의 아침은 주기적으로 받는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면서 시작된다. 구독료를 주면 로스터리에서 추천하는 스페셜티 원두를 1주일에 200g씩 받아볼 수 있다. 세안을 하고 화장품을 바르려고 보니 화장품이 다 떨어져가는 것을 확인했지만, A씨는 걱정이 없다. 피부 타입과 계절에 맞게 알아서 화장품을 보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화장대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오늘 입고갈 옷은 새벽에 구독서비스로 받은 옷이다. 1주일에 한 번 배송 받고, 2주간 착용하고 반납은 문앞 손잡이에 걸어놓기만 하면 끝이라 간편하다. 패션이 중복되는 것도 옷장이 터져나가는 것도 싫은 A씨는 옷 구독 서비스가 너무 만족스럽다. 구독중인 인터넷 신문을 보며 출근하고, 쉬는 시간에는 유튜브에서 구독중인 고양이 채널 영상을 보면서 힐링한다. 퇴근 후에는 배송된 밀키트로 저녁을 먹는다. 오늘의 밀키트는 밀푀유 샤브샤브. 1인용이라 재료가 남을 일도 없고, 장보는 시간도 단축되니 효율적이다. A씨는 샤브샤브를 먹으며 넷플릭스로 해외 드라마를 느긋하게 보며 하루름 마무리 했다.
A씨의 일상이 유별나지 않을 정도로 구독경제는 우리 생활 속 깊이 스며들었다. 구독경제(subscription economy)는 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것처럼,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정기적으로 제품이나 콘텐츠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권리를 제공받는 경제 모델을 일컫는다.
굳이 만나서 설명하거나 탐색하지 않아도, 내 취향에 맞는 먹거리, 쓸거리들이 내 손 안에 들어온다. 과거부터 우유·신문 배달 형태로 존재하던 구독경제는 기술 발전과 함께 제품·서비스가 다양해졌다. 최근에는 화장품·세면용품, 커피·주류, 꽃·그림 등 거의 모든 제품에 대한 구독이 가능하며, 시장 규모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에 따르면 전 세계 구독경제 규모는 지난 2000년 2,150억달러에서 2015년 4,200억달러로 성장한 데 이어 올해 5,300억달러까지 규모가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구독경제 마케팅>을 쓴 존 워릴로우는 “우리는 더 이상 주류 출판업자들이 제공하는 아주 개략적이고 일반적인 정보에 만족하지 않게 됐다. 콘텐츠에 대한 취향이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출판계뿐만 아니라 먹고 쓰는 생활 전반에 해당된다. 취향의 세분화와 이에 맞춤한 경험들, 구독경제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상 구독 플랫폼 ‘넷플릭스’ 회원 가입과 술·꽃·청소·운동 구독 등이 그 예다.
처음 몇 번 내 취향을 고르고 나면 내 마음을 읽은 듯 취향을 반영한 콘텐츠와 제품을 제공한다. 유튜브에서 강아지 영상을 보고 ‘좋아요’를 눌리면 다음에 접속했을 때 홈화면 상단에는 내가 ‘좋아요’를 눌렀던 영상과 유사한 영상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개개인은 브랜드의 정기 회원이 되고, 추천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정교한 구독 서비스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이와 같은 구독 경제를 소비하는 주축은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다. 지난해 하나경제연구소가 발간한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서의 구독 경제>에 따르면 20~30대 청년층은 저성장의 장기화로 소득 규모와 관계없이 소비자로서의 욕구가 즉각 충족되는 소비에 더욱 관심을 쏟는다. 즉 경험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이같은 소비 트렌드는 전 세대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던 구독경제는 코로나19 시국을 맞이해 날개까지 단 격이다. 최근 신한은행이 발표한 ‘2020 금융생활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요가 많아지면서 정기배송 서비스 이용자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국의 소득 생활인 1만명 가운데 정기배송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한 응답자는 25%, 6개월 안에 이용 계획이 있는 응답자까지 포함하면 40%에 달했다.
구독경제에 가장 큰 걸림돌은 배송이었다. 통상 2~3일 정도 걸리는 택배 배송을 이용하면 신선함이 생명인 식품은 구독경제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지만, 로켓배송·새벽배송 등이 일상화되고 산소포장, 냉장배송 같은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신선한 상태에서 배송이 가능해져, 이제는 식품업계도 구독경제에 발이 묶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언택트(비대면) 소비가 대세로 떠오르며 신석식품 구독경제는 날개를 단 듯 성장하게 됐다.
육류는 냉동육이 아닌 신선육 상태로 배달되고, 냄새 때문에 꺼려졌던 생선요리도 프리미엄 밀키트 형태로 전자레인지에 돌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형태로 보내진다. 유정란과 동물복지 인증 달걀과 육류제품 등의 정기배송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구독경제 시장이 가장 치열한 분야로는 ‘간편식’이다. 손질된 식재료와 양념으로 구성된 ‘밀키트’나 반조리된 ‘레디밀’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구독해서 이용하는 게 일찍 안착됐다. 국내에서도 1인가구의 증가와 비대면 수요 증가로 인해 밀키트 시장은 나날이 다양해지고 있다. 온라인 반찬마켓, 밀키트 전문 브랜드를 비롯 당뇨·암 환자 식단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밀키트 정기구독 서비스 등 세분화된 취향으로 선택할 수 있다.
‘착한 소비’는 구독경제 속으로도 녹아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타격을 입은 소상공인을 지원하거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효과를 불러오는 소비가 이에 해당한다.
정기적으로 꽃을 구독하면 침체된 화훼 농가를 도우면서도, 구독자가 낸 구독료의 일부가 청각장애인들의 플로리스트 교육에 사용되는 꽃 구독 서비스는 클라우드 펀딩으로 목표의 1400%를 달성했다.
유통업계에 있어 구독경제는 갑작스럽게 새로 등장한 비즈니스 모델은 아니다. ‘우유 배달’, ‘신문 배달’처럼 우리 생활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서비스 경제 중 하나다. 하지만 모바일 통신의 발달과 새로운 모빌리티의 등장, 유통시장의 발전 등으로 다양해진 개인의 취향과 상세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서비스가 세분화 된 것이다.
구독경제 서비스를 통해 사업자는 정기 단위의 고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고정적인 수입은 더 나은 서비스를 계획할 수 있게 만들어, 소비자의 니즈를 빠르게 파악해 신제품 개발이나 서비스 품질 향상시킬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서비스를 경험하고, 고정비로 가계 지출을 관리하기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현명하게 이용하지 못할 경우 ‘냉장고에 쌓이는 우유’처럼 불필요한 지출이 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
홍수처럼 구독이 넘치는 시대다. 넘쳐나는 포인트카드를 정리해주던 서비스처럼, 너무 많은 구독 서비스 때문에 이를 정리해주는 구독 관리 서비스도 출시됐다고 한다. 의식주를 넘어 취미생활과 자동차, 가구·가전에 이르기까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하루를 촘촘히 채우는 다양한 구독의 세계. 이 또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