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 같은 성능의 두 제품이 있다면 과거에는 더 저렴한 제품이 각광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렴한 가격에 성능과 효율이 좋은 것만을 찾던 시절은 저물었고, 소유했을 때 더 만족도가 높은 쪽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름하야 가성비보다는 가심비가 더 부상한 시대다. 사소하게는 소비, 문화생활과 여행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가심비를 따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격 대비 성능을 뜻하는 가성비(價性比)에 마음 심(心)을 더한 것으로 가성비는 물론이고 심리적인 만족감까지 중시하는 소비 형태를 일컫는다. 가성비의 경우 가격이 싼 것을 고르는 경우가 많지만 가심비의 경우 조금 비싸더라도 자신을 위한 것을 구매한다.
가심비는 2년 전부터 소비트렌드로 거론되긴 했지만, 최근 사회 전반에 걸친 트렌드로 정착한 모습을 보인다. 일부 젊은 사람들은 정말 만족도가 높을 때는 가심비를 ‘갓(god)심비’라고도 부르며, 가심비가 높다고 입소문을 모으는 상품이 히트 상품이 되는 일은 허다하다.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동남아 여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일본 불매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던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하지만 일본여행은 도쿄와 오사카 같은 도시여행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좁은 비즈니스 호텔과 도보 이동이 많다는 점으로 인해 휴식이 목적인 사람들에게는 온천여행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만족도가 높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동남아가 급부상 한 것이다. 특히 지난해에만 400만 명이 방문한 베트남은 한국인으로 특수를 누리고 있는 지경이다. 양국을 오가는 비행기는 하루에 90편이 넘으며, 특히 베트남 중부 해변도시 다낭은 ‘경기도 다낭시’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 사람들로 북적인다. 푸켓이나 세부처럼 에메랄드 빛 바다를 거느린 것도 아니지만, 화려하고 편한 값싼 숙소들이 즐비해 가심비를 찾는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설연휴에 3대가 함께 다낭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지모 씨는 “영화에 나올 법한 호화로운 독채 풀빌라를 국내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묵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데, 삼시세끼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에, 마사지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며 “아직 어린 조카를 데리고 온 오빠네도, 무릎이 아픈 어머니도 푹 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모두 만족했다”고 전했다.
소비에서도 개인의 만족도가 우선되는 경향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아이돌 굿즈나 친환경 제품 판매가 늘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팬클럽 공식 굿즈는 콘서트용 응원봉을 넘어서 옷이나 노트 등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대폭 늘어났다. 아이돌이 광고하는 상품은 해당 아이돌 팬층이 선호하기 때문에 더 많은 판매고를 올리기도 한다. 피부로 다가오는 미세먼지의 두려움과 미세플라스틱의 위험성에 경각심을 느낀 사람들은 친환경 제품, 착한 소비를 위해서는 지갑을 연다. 플라스틱 반찬통 대신 스테인레스 통을 사용하고, 재활용된 플라스틱을 이용해서 만든 뽀글이 플리스는 올 겨울 패션을 점령했다.
무조건 저렴한 것이 아닌, 가격이 비싸더라도 만족감이 높은 브랜드를 선호하기도 한다. 발렌시아의 ‘어글리 슈즈’, 에르메스의 ‘젤리슈즈’ 등 명품 브랜드에서 젊은 층을 겨냥해서 내어놓은 상품들은 품절이 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제품 자체는 기존 명품의 틀을 완전히 깨부수는 형태지만, 해당 브랜드를 소지했다는 만족감으로 소비가 이뤄지는 것이다.
가심비는 극장가에서도 조금씩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동영상 플랫폼이 일반화되고, IPTV 등에서 극장가 동시개봉 작품도 선보이자, 신작 영화를 굳이 영화관에 가서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본 영화가 흥행작이 되지만, 입소문을 타거나 신드롬을 타지 않으면 과거만큼 흥행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4DX, IMAX과 같이 특수관에서 상영되는 작품들은 티켓 가격이 더 비싸도 매진이 될 정도다.
그밖에도 마트에서 직접 장을 보기 보다는 인터넷으로 배달을 시켜서 시간을 절약하거나, 나들이와 쇼핑까지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아울렛과 같은 대형 쇼핑몰을 찾는 등 단순한 가격대비 경쟁력이 아닌, 소비에 얼마나 만족할 것인가를 다각도로 살펴보고 소비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가격대를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는 중간층이 없이 양극단의 소비가 활발한 상황이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가계의 수입 중 소비할 수 있는 규모는 최대 600만 원 이상 차이가 났다. 소득이 양극화 되면서 고소득층은 백화점을, 저소득층은 저렴한 것을 찾아 소비하는 식이다. 백화점 명품 브랜드 앞에는 줄을 서서 입장하고, 편의점에서는 좀 더 저렴한 PB상품 매출이 도드라진다. 수입에 맞춰 자기가 만족하는 쪽으로 소비가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보다 정보를 얻기 쉽기에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소비처를 찾기 용이해진 점도, 가심비 노선에 힘을 싣고 있다. 정보 접근성이 높아진 것은 특히 해외여행에 날개를 달았다. 여행 브이로그를 만드는 한 누리꾼은 “제주도를 여행하나 대만을 여행하나, 호텔이나 항공권 예약하는 건 똑같은 수고가 든다”며 “굳이 그렇다면 남들이 다 가는 곳보다는 나만의 여행지를 찾아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다”고 밝혔다.
실제로 항공권 자체는 공항이용료나 유류세가 더해져 해외가 더 비싸지만, 저가항공사의 특가를 활용하면 제주도를 가는 것과 비슷한 가격으로 갈 수 있고, 현지 물가를 고려하면 식비나 숙박비 등이 저렴해져서 가심비적으로는 해외여행이 더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국내여행은 나들이처럼 가까운 곳으로 짧게 다녀오고, 휴가는 해외에서 보내는 식으로 여행을 즐기고 있다. 즉, 가심비의 시대에서 국내여행 시장이 점점 규모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국내여행 시장도 변화하고 있다. 지역축제 참가, 출사, 스포츠경기 관람 등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는 색다른 패키지여행이 선보이고 있고, 호캉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잡기 위한 이벤트도 휴가철이면 성황을 이룬다.
특히 국내여행은 그 지역의 맛집을 찾아가는 것이 거의 필수로 자리 잡았다. 문화체육부가 2018년 실시한 국내관광 지출 비중 조사에 따르면, 여행경비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것은 식비였다. 부산역 앞 소문난 밀면 맛집에는 주말이면 길게 줄이 생기고, 대전 은행동의 대전 대표 빵집은 여전히 문전성시다.
올해는 공휴일이 적고, 최근 불어 닥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더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국내여행지에 사람이 몰린다고 해서 바가지요금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국내여행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들만 더 줄어들게 만드는 꼴이 될 것이다. 한 두 번의 단순한 관광이 아닌 재방문율이 높은 관광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행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