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화제의 학술정보 ㅣ강승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국가 PR로 분석한 논문...

화제의 학술정보 ㅣ강승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국가 PR로 분석한 논문 발표’

공유

“헤이그 밀사는 한국 최초의 PR 투사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대한제국의 광무황제(고종)가 파견한 미국인 1인을 포함한 4인의 특파전권밀사들이 일본의 불법적이며 부당한 침략 사실을 알리고 대한제국이 자주적 주권국가임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통치기관인 통감부를 한성에 둘 수밖에 없는 처지에다 국가 외교권마저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광무황제는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열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으며, 마침 만국평화회의 제2차 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러시아로부터 전해 듣고 밀사들을 파견하여 대한제국이 독립적 주권국가임을 홍보할 전략을 짜게 된다.

이와 같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PR 학문으로 접근해 한국 최초의 국가적 PR이었다는 논증으로 논문을 발표해 관련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논문을 발표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강승구 교수(현 서울지역대학장)는 “국가 PR의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고찰해보고 후학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연구의 목표를 밝혔다.

이에 본지는 <화제의 학술정보>로 이 논문을 요약해 2회에 걸쳐 시리즈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만국평화회의와 광무황제 밀사 파견의 의의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인해 1899년 5월 19일부터 7월 29일까지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이 당시 열강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식민지를 넓혀갈 때이며, 군비경쟁을 하는 때였다. 제2차 평화회의도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주도하여 1907년 6월 15일부터 45개국 대표가 모여 약 4개월에 걸쳐 회의를 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특사들은 7월에 헤이그에 도착하게 된다. 러시아는 1905년 9월 미국에서 포오츠머드 강화회담 종료 후 2차 평화회의를 소집하고 47개국 중에 대한제국도 포함되었으며,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을 통하여 통보받게 된다. 하지만 1906년 개최될 예정이던 2차 회의는 다음 해인 1907년으로 연기하게 되었고, 광무황제는 밀사 파견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벌게 된다. 2차 평화회의의 주제는 ‘전쟁법규(Law of War)에 관한 협정’이었다.

사실 광무황제는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기 전에도 국가의 주권 회복을 위한 외교적인 노력을 계속해서 해오고 있었다. 1904년 6월에는 이임 예정이었던 주한 프랑스 공사 퐁트네 자작에게 부탁하여 귀국길에 러시아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전달하게 한다. 광무황제는 친서에서 일본의 야욕을 경계하면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할 것을 성원하며, 러시아의 지속적인 도움을 청한 바 있다. 니콜라이 2세도 회신을 통해, 일본이 전쟁 중에 대한제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은 무효임을 확인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1905년 6월 러일 간에 강화회담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은 광무황제는 탁지부대신 이용익을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밀파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존시켜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게 된다. 이 외에도 1904년 말 주미공사관의 고문이었던 콜럼비아대학 총장인 니덤(C.W. Needham)을 통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밀서를 전달했으며, 1905년 초에는 미국에 가있는 이승만을 통해 국무장관 헤이를 면담하게 한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러일 강화회담에 이승만을 밀사로 파견하게 된다. 그리고 8월 4일에 이승만은 한국교민 대표인 윤 병구 목사와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게 된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며, 광무황제의 요청을 거절한다. 같은 해 10월, 다시 광무황제는 친한 인사인 헐버트 박사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면서, 1882년 체결된 조선미국수호조약에 의하면 “환란(患亂) 시 거중 조정”할 수 있는 조항을 들어 일본의 침략을 견제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인 11월 26일에는 헐버트 박사에게 “을사늑약은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보냈다. 주불공사 민영찬에게도 밀령을 내려 미국 국무장관 루트(E. Root)를 만나게 했다. 12월 11일 민영찬이 루트 국무장관을 만났지만,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으므로 미국은 어떠한 협조도 할 수 없다는 답만 받았다. 이 외에도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H. N. Allen)에게 1만 달러의 경비와 광무황제의 어새가 찍힌 친서 등이 전달되고 미국정부와 교섭이 진행되었지만 미국 정부는 광무황제의 이런 노력을 모두 거절한다. 그러자 광무황제는 1906년 1월 19일 외국 기자인 『런던 트리븐』지의 스토리(D. Story)에게 부탁하여 주중 영국공사에게 친서를 전송케 한다. 이 친서에서 광무황제는 앞으로 5년 동안 열강이 한국을 보호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광무황제는 만국평화회의를 1905년부터 대비하게 되는데, 1905년 10월 3일 자로 러시아로부터 정식 초청장을 받게 된다. 먼저 회의 참석을 위해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1906년 4월 파송한다. 하지만 평화회의가 1년 연기되자,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에 머물게 되고, 1년 후인 1907년 4월 21일 광무황제는 전 평리원 검사 이준을 부사로 하여 헤이그로 파견했고, 이준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정사인 이상설과 합류하게 된다. 5월 21일 두 특사는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6월 4일 도착하게 되고, 거기서 주러공사 이범진의 아들 전 주러공사관 참사관 이위종을 만나 3명의 특사진이 구성된다. 15일 동안 그곳에 머물며 니콜라이 2세에게 광무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게 된다.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달한 특사의 공식 직함은 ‘대한제국 황제 특파전권밀사(特派全權密使)’였다. 6월 19일에 페테르스부르크를 출발하여 독일 베를린에 들러서 평화회의에 제출하게 될 공고사(控告詞)를 인쇄하게 된다. 그다음 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에 6월 25일 드디어 도착한다.

한편 광무황제는 세 명의 공식적인 비밀특사를 파견하는 것 외에 비공식 비밀특사 한 사람을 파견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 박사이다. 광무황제는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박사를 ‘특별위원’으로 임명하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9개국에 파견하면서 1년 뒤 헤이그에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 3명의 공식적 비밀특사들과 합류하게 한다.

헤이그에서 특사 일행은 드용 호텔(Hotel De Jong)에서 체류하게 되는데, 호텔 문 앞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활동하게 된다.

한편 만국평화회의(The 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는 제1차 회의에서 26개국 대표들이 모여서 군비축소와 중재문제를 토의했으며, 중재재판소의 설립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2차 회의에선 46개국의 외교관과 군인들이 모여서 주로 전쟁법규(The Law of War)의 제정을 논의했다.

광무황제가 헤이그에 특파전권밀사를 파견한 논리는 우선 광무황제가 특파전권밀사들에게 발행한 신임장 안에 잘 나타나 있다. 광무황제는 특사들에게 1907년 4월 20일 자로 위임장을 내린 바 있다.

“대한제국 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공사관 참사관 이위종에게 주는 위임장.

대황제는 칙(勅, 황제의 명령을 적은 문서) 하여 가로되, 아국의 자주독립은 이에 천하열방이 공인하는 바라.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로부터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가진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에 있어서 일본이 아국에 대하여 나라 사이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리의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뿐더러 그 침략적 야심은 인도에도 위배되는 것이기에 좋게 기록할 수가 없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여기 종이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아공사관 참사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화란 헤이그 평화회의에 나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우리의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하건대, 이번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수결(手決), 어황 보제.”

위 위임장의 골자는 첫째,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불법으로 강탈하였다는 점 둘째, 공법을 위배한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외교권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광무황제는 특히 1905년 11월 18일에 발생한 ‘을사늑약’이 불법적이며 비합법적임을 밝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고자 특사를 파견한다는 것을 위임장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료 등을 토대로 해서 광무황제의 특사파견의 논리를 다시 정리해 보자.

첫째, 대한제국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만국평화회의에 정식으로 초청되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평화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의 자료에도 보면 초청 대상국 47개국 중 한국이 12번째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둘째, 1904년 러일전쟁 직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 체결)의 내용과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의 내용이 상호 모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일의정서의 제1조에서 제3조까지의 내용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을사늑약의 내용은 대한제국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을사늑약은 광무황제가 윤허하지 않자 을사오적의 찬성을 바탕으로 1905년 11월 18일 새벽에서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광무황제는 황제의 승인 없이 강행된 조약의 모순을 바로잡고,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자 헤이그에 특사들을 파견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셋째, 당시 만국평화회의는 ‘평화와 정의’ 그리고 ‘법과 정의’같은 구호들을 표방하고 있었다. 광무황제도 이 점을 간파하고 있었고, 특사들도 이 점을 강조하면서 헤이그에서 활동을 펼쳤다.

이와 같이 광무황제는 나름대로의 철학과 전략을 가지고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들을 파견한 것을 알 수 있다.

<문화관광저널 2월호에 계속>

 

글 강승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강승구 교수는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미디어영상학과) 서울지역대학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연세대학교·대학원(신문방송학 석사)을 졸업하고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광고마케팅학(석·박사)을 전공했다.

그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교육매체개발연구소장·출판문화원장·부산지역대학장·사회과학대학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광고철학연구회장·서울국제문화예술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