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이익태 지영록’,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등 조선 시대 서책과 불교 조각, 신라 시대 금귀걸이 등 4건에 대해 보물로 지정했다.
또한 보물 제455호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의 명칭은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변경했다.
보물 제2001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慶州 皇吾洞 金製耳飾)’는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 쌍이다. 외형상 주고리[主環], 중간장식, 마감장식의 삼단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 시대 5~6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이 귀걸이는 신라 시대 경주에서 만든 전형적인 귀걸이 형태라는 점, 제작기법과 조형성이 우수하고 펜촉형 장식물의 창의적인 형태와 입체감이 돋보이는 점 등에서 신라 고분 금속공예품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신라 장신구의 발전과 변화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보물 제2002호 ‘이익태 지영록(李益泰 知瀛錄)’은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익태(1633~1704)가 1694년(숙종 20년)년 7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래 1696년(숙종 22년) 9월까지 재임기간 중의 업무와 행적, 제주 관련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서문에 의하면 이익태는 제주목사를 역임하면서 알게 된 제주도의 열악한 생활상과 누적된 폐단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참고하기를 바라며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 책은 제주도의 문화와 지명 등의 연원을 이해하는 데에 실질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외국인의 표류 상황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시대 표류민 정책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보물 제2003호 ‘남양주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南楊州 佛巖寺 木造觀音菩薩坐像)’은 17세기 전반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승 무염(無染)을 비롯해 총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해 1649년(인조 27년)에 완성한 불상이다.
높이 67cm의 단아한 규모에 머리에는 연꽃과 불꽃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썼으며, 가사는 두벌 겹쳐 입은(이중착의법) 모습에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렸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신체의 자연스러운 양감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정확한 제작 시기와 봉안처를 알 수 있고,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해 17세기 중엽 불교 조각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 제2004호 ‘서울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七寶寺 木造釋迦如來坐像)’은 1622년(광해군 14년) 광해군의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장렬왕후 章烈王后)가 왕족들과 친정 부모의 천도를 목적으로 발원해 왕실 원찰(願刹)인 자수사(慈壽寺)와 인수사(仁壽寺)에 봉안한 11존(尊) 불상 중 하나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17세기 대표적 조각승 현진(玄眞)과 수연(守衍), 응원(應元), 인균(印均) 등 당대 유명 조각승들이 합작해 만든 불상으로, 조각승들의 제작 특징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작품이다.
기법이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간결하지만 중후한 기품과 위엄이 느껴지며, 17세기 전반 불상 중에서 수준 높은 작품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월등히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편, 보물 제455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慶州 皇吾洞 金製耳飾)’는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명칭을 변경했다.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는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와 더불어 신라 시대 장신구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진 작품이다. 이번 명칭 변경은 보물 제455호가 1966년 일본에서 환수된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임에도 불구하고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인식돼 온 것에 대해 바로잡는 조치이다. 이로써 총 3점의 경주 노서동 출토 지정문화재(금팔찌, 금귀걸이, 금목걸이)는 각각 보물 제454호, 제455호, 제456호로 차례로 지정번호가 연계됨에 따라 효율적인 보존관리 기반을 갖추게 됐다.
황정윤 기자 hjy@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