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도, 미래도 없는 오직 현재만 존재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동안 휴일에도 지난 일들과 앞으로의 과제로 마음 편한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생전 최장 연휴를 맞이하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올 추석은 정부가 10월 2일 월요일을 대체 휴일로 지정하면서 3일 개천절까지 6일간 연휴였다. 그동안 일상에 쫓겨 연휴다운 연휴를 보낸 기억이 별로 없었기에 더욱 고대했었다. 이번 휴일만큼은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다. 사실 명절 연휴는 대가족이 모여 함께 즐기는 시간이라 개인의 자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각처에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명절을 맞이해 고향 방문과 산소 참배, 친척 인사 등으로 화목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연휴가 끝나버린다. 게다가 명절 차례까지 지내다 보니 아내는 며칠 전부터 차례 준비에 몸살을 앓는다. 코로나 발생 이후부터 묘제(墓祭)로 전환하면서 북적대던 명절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나마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길게 주어진 이번 연휴만큼은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휴식도 취하면서 보람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잔뜩 기대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오직 현재만 존재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동안 휴일에도 지난 일들과 앞으로의 과제로 마음 편한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늘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는 휴식 등 힐링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생활이었다. 물론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성장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절박한 시절이어서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벽을 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생활 전선에서, 휴가란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신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즐기고자 나름대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상했지만, 일정에 구속되고 싶지 않아 모두 포기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무계획이 계획인 연휴를 즐기기로 했다. 고민 없이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행동으로 옮기면서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자 한 것이다.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연휴를 즐기면서 자연스레 내일을 위한 재충전도 풀(full)로 이뤄졌다.
연휴 첫날, 아침 일찍 명절도 없이 학업에 열중하는 딸아이의 원룸에 아내가 준비한 먹을거리를 전달하고는 고향으로 달렸다. 명절 전날 고향으로 가는 길은 20여 년 만이다. 들녘의 너울거리는 황금물결이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안겨 왔다.
다음날 산소에 올라 제향을 올리고, 고향 생태공원으로 나들이했다. 아름다운 코스모스 길에서 아내를 모델로 스마트폰을 누르고, 만개한 연분홍 핑크물리 품속에서 멋진 장면들을 추억으로 남겼다. 무아지경으로 자연의 정취에 흠뻑 젖었으며, 사진 모델이 된 아내의 환한 얼굴에도 모든 시름이 사라졌다. 멈추고 싶지 않은, 오직 현재의 기쁨을 즐기는 순간들이었다, 지난 세월의 고달픔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는 지상 최고의 낙원을 향유하는 시간이었다.
셋째 날에는 낙동강 줄기를 조망하며 향어회와 장어·털게탕으로 반주를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다’는 말이 이럴 때 어울릴 것 같다.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는 나만의 만족이다. 긴 연휴로 마음을 비우니 이런 호사를 누리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작심하고 나선 길이라 근심·걱정을 잊어버리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일상에 시달리면서 휴일을 휴일같이 즐겨보길 얼마나 원했던가.
넷째 날은 결혼 후 한 번도 명절에 친정을 가본 적이 없다는 아내의 투정에 늘 미안하고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이번 연휴로 처가인 하동을 들릴 여유도 생겼다. 장모님을 모신 납골당에 들려 추모하고 장인 묘소를 참배한 후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정의 평화와 화목을 느끼며, 그동안의 삶을 반추해 보기도 했다.
남해 바다의 보석 같은 섬들과 하동 진교의 황금 들녘을 품은 아늑한 마을들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감동의 물결이 가슴으로 밀려들고 인생의 낙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기도 하면서 농촌의 가을 풍경을 음미하며 시골길을 달렸다.
가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세상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희열을 누려 보고 싶은 로망을 실현해 보자. 인생의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