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온 바람이 선선해서, 하늘이 높고 푸르러서, 가볍게 가방 하나 들고 어디론가 떠나고 문득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도심의 화려함도 좋지만, 차분하고 따뜻한 가을을 소소하게 느끼고 싶다면 충청북도 청주로 향해보자.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수암골 벽화마을에서 골목길 산책도 해보고, 대통령의 휴가지였던 청남대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옛 모습 그대로의 토성에서 고요한 노을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거나 현대미술관과 고인쇄박물관에서 문화의 향기에 담뿍 취해볼 수도 있다. 낭만적인 가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청주시에 빠져보자.
천년고도의 위용 <상당산성>
청주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인 ‘상당산성’은 청주시의 역사와 자연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명소다. 멀리서 보아도 상당산이 머리에 띠를 두른 듯 또렷하게 보이는 성벽은 위기 때마다 청주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파수꾼이다.
상당산성은 상당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둘레 4.2km, 높이 4~5m의 성곽이다. 성 안에는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다. 조선군이 훈련하던 동장대는 1992년에 복원해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대조영>, <태왕사신기>, <카인과 아벨> 등 유명 드라마의 촬영지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소나무 숲 우거진 길을 따라 옛 성곽을 걷고 있노라면 자연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도시인 청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상당산성을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성벽 위를 걸으며 하늘과 어우러진 산성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성곽길’이며, 두 번째는 성곽 아래의 숲속을 걸으며 청주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숲속 등산길’이다. 성안에는 전통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어 청주의 별미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상당산성의 특산품인 대추술과 빈대떡을 함께 먹으면 산성을 돌고난 고단함을 녹아내릴 것이다.
역사의 숨결이 깃든 대통령별장 <청남대>
1983년 준공된 이래 민간에 공개되지 않았던 대통령의 별장 ‘청남대’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다. ‘남쪽에 있는 청와대’라는 뜻의 청남대는 1980년 전두환을 시작으로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 대통령의 휴가지로 사랑받았다. 2003년 처음 청남대를 공개할 때만 해도 ‘금으로 만든 수도꼭지가 있을까?’란 의견이 분분했지만, 금 수도꼭지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를 자랑하고 있다.
청남대 진입로 양쪽은 아름드리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그 너머엔 대청호가 펼쳐진다. 첫 번째 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청남대의 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청남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첫 번째 보물은 다름 아닌 길에 빼곡히 늘어선 430여 그루의 백합나무다. 백합나무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햇볕이 내리쬐는 낮이지만 나무 아래 길은 그늘이 진다. 이 길은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히기도 했다.
청남대에는 대통령이 사용한 건물 몇 동과 잘 가꿔진 아담한 정원, 몇 갈래의 산책로가 있다. 본관 옆에는 대통령의 손자가 놀았음직한 어린이놀이터와 비행기모형, 수영장·테니스장 등 운동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외에도 지금은 예술작품이 자리를 차지한 헬기장,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낚시를 즐겼다는 양어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향수가 서려 있는 초가정, 대청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오각정과 9홀의 골프장 옆에 위치한 그늘 집까지 청남대는 역사가 서려 있는 볼거리가 가득하다.
정원에서 호수 앞 정자로 이어지는 소나무 오솔길과, 배밭 사이로 나 있는 배밭길, 호반을 따라 1㎞ 정도 가늘게 이어진 긴 산책길을 걸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사색에 잠기게 된다. 산책을 즐기다 보면 역대 대통령들의 모형을 만나볼 수 있기도 하며, 대통령역사문화관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청남대에 대한 이야기까지를 자세하게 만나볼 수 있다. 매년 4월과 10월에는 청남대 축제가 있어 다양한 행사가 열려 청남대의 매력을 특별하게 만끽할 수 있다.
달동네의 빛나는 변신 <수암골 벽화마을>
‘청주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렸지만, 지금은 벽화마을로 유명해져 카페들이 곳곳에 들어서고 청주에서 가장 유명한 골목이 된 곳이 바로 ‘수암골’이다.
수암골은 청주 나들목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터널을 지나 무심천을 건너면 갈 수 있다. 나지막한 우암산 자락에 6·25 전쟁으로 피란민들이 정착한 산비탈 마을이다. 전국에 많은 벽화 마을이 있지만 수암골의 벽화에는 지역 주민들의 의견이 들어가 있어 한층 정감이 간다.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거나, 뛰어 노는 모습을 소재로 그린 벽화들이 사뭇 따뜻하다.
셔터를 누르면 사람 냄새가 찍힐 것 만 같은 풍경으로 수암골 벽화마을은 출사지로도 촬영장으로도 사랑받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KBS 2TV의 <제빵왕 김탁구>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제빵왕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팔봉빵집이 마을 초입에 남아있다. 제빵점에선 아직도 드라마에 나온 봉빵 등을 판매하고 있다.
수암골은 전부 돌아보는 데 한 시간 남짓으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천천히 느긋하게 쉬어가듯 걸어가는 것이 묘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벽화의 따스함과 달동네의 정겨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연초제조창 창고의 변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지난해 12월 개관한 따끈따끈한 곳이다. 옛 연초제조창 창고를 리모델링해 우리나라 최초 수장형 미술관으로 꾸렸다. 수장형 미술관의 특징은 작품을 보존하고 있는 상태도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이는 수장고는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받는 작품 중심 수장고이며 창문 너머로 작품을 볼 수 있다. 1층 개방 수장고는 조각 작품을 수장·전시하는 길이 14m에 높이 4m 크기 3단 철제 선반 4개와 작품을 운반할 때 쓰는 알루미늄 받침대가 인상적이다. 개방 수장고 전시는 5층 기획전시실과 비교하면 작품 수와 배치 등에서 차이가 확연하다.
청주관과 이웃한 동부창고도 옛 연초제조창 창고를 리모델링했다. 34동 갤러리와 36동 책골목길 위주로 돌아볼 만하다. 천장의 목조 트러스에서 1960년대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충북문화관은 1939년 건립한 청주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를 활용했다.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해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다. 다다미방을 개조한 북카페는 여행 도중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찬란한 우리의 문화를 만나다 <청주고인쇄박물관>
기록되지 않은 것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역사와 지식, 있는 그대로의 그 시대를 전하기 위한 선인들의 부단한 노력이 인쇄문화다. 특히 금속활자는 목판에 비해 공이 많이 들고 높은 기술을 요구한다. 찬란한 우리의 활자의 발달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청주고인쇄박물관’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고인쇄문화전문박물관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할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드문 특별한 박물관이다.
청주에서 발견된 『직지』는 금속활자로 찍은 책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서적이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도 직지의 가치를 인정했다.
박물관에서는 『직지』를 제작한 금속활자 인쇄 과정을 실물 크기의 인형물로 사실감 있게 소개하고 있어 누구나 쉽게 고인쇄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또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우리나라의 인쇄문화 발달사,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서양의 인쇄문화발달사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금속활자 인쇄방법을 직접 따라 해볼 수 있는 체험공간도 있고, 판매점에서 저렴한 가격에 특색 있는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다. 또한 도슨트 서비스를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어, 보다 깊이 인쇄문화를 이해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조용한 가을을 만나다 <정북동토성>
도심을 벗어나 북쪽 미호천 방향으로 향하다 철길을 건너면 불쑥 흙담이 마중을 나와 있다. 커다란 제방처럼 보이는 이 성은 서울 풍납토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이다. 특히 정북동토성은 형체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토성으로 둘레가 650여 미터에 이르는 정사각형 형태의 성이다.
몇 걸음만 옮기면 성벽 위에 올라설 수 있다. 야트막한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면 토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동서남북으로 문터가 남아있고, 남문과 북문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았다. 이는 적이 성으로 곧바로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든 옹성의 초기형태다. 성의 네 귀퉁이와 성벽중간에는 앞으로 내어쌓은 곳이 보인다. 이것은 성벽을 옆에서 감시하고, 유사시 성벽으로 달려드는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치성의 초기 형태이다. 성 밖으로는 방어시설인 해자가 파여 있다. 이곳이 토성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큰 공원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다.
멋진 카페나 레스토랑도, 화려한 조명도 없는 토성이지만, 가을의 해질녘이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찾는다. 정북동토성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특히 노을사진 명소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해질녘 붉은 하늘을 배경 삼아 인생샷을 건져간다. 낮에는 셀프 웨딩촬영을 하는 사람들도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족, 연인, 친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사진명소가 되었다.
성벽 위 파란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면, 노을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외로이 서 있는 왕따나무 옆에서 포즈를 취해보자. 토성을 중심으로 해가 지고 있기 때문에, 역광으로 사진을 찍으면 검은색 실루엣만 나오는 멋스러운 사진을 연출할 수 있다. 해지는 순간의 찰나, 고요한 사색 혹은 찰나의 추억이 사진 한 장에 오롯이 담긴다.
지역의 문화를 만끽하고, 축제를 즐기고, 색다른 체험을 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여행의 하나다. 그저 퇴근길의 풍경 중 하나였던 노을을, 가을녘 청주의 오래된 토성에서 만끽해보자.
글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
사진 청주시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