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적산가옥, 일본인 집을 왜 보존해? 아픈 역사적 시간을 지난 근대건물의 문화재적 가치

적산가옥, 일본인 집을 왜 보존해? 아픈 역사적 시간을 지난 근대건물의 문화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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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가 뜨겁다. 지난해 국내 최초로 면 단위 전체가 문화재 지구로 지정된 목포 구도심에 손혜원 무소속 의원이 1년여 전부터 건물 수십채를 조카·남편 재단 등의 명의로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중심인 목포 구도심을 보기 위해 연일 관광객이 모여드는 웃픈 현상까지 일고 있다. 문제는 일각에서 손 의원이 매입을 추천한 적산가옥 같은 근대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적산가옥의 적산(敵産)은 말 그대로 적들이 만든 집이라는 뜻으로, 근대 및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지은 건축물을 뜻한다. 부산, 군산, 목포 등과 같이 과거에 일본인 촌을 이루었던 지역엔 아직까지 꽤 많은 수가 남아있고, 사람이 사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해방 후 혹은 6.25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거나 재개발 사업 등으로 사라져서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같은 건물을 보존하려는 입장은 항상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독도, 최근에는 군사 문제까지 한일관계는 언제나 예민한 이슈다. 아픈 역사도 역사인 만큼 부정하고 지우려하기보다 기억하고 교훈 삼는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는 입장과, 치욕스러운 일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입장은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

1995년 광복절,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철거됐다. 당시에도 해당 건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에 부딪혔지만, 경복궁 복원이라는 압도적인 여론에 힘입어 폭파 철거 됐다.

총독부가 철거된 뒤 일제강점기 유산은 대부분 철거나 파괴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역사청산’을 이유로 의도적으로 건물을 훼손하거나, 공공기관에서도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2008년 구 서울시청 청사를 두고는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국회에서 ‘일제잔재 건축물 서울시청, 존속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려 찬반이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여론은 문화재청의 손을 들어줬다.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는 것은 한낱 이벤트였을 뿐, 시민들이 기대한 근본적인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못했고, 아픈 역사를 직면하고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공소유와 개인소유는 다르다. 개인 소유의 경우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기피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개인의 사유재산이더라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 마음대로 변경하거나 활용하기 어려우며, 문화재 보호를 위해 유지비가 발생하게 된다. 일반적인 재산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 문화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않는 소유주라면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일부 소유주들은 일부러 건물을 훼손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철거해버리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일삼기도 한다.

국내 초창기 극장 건축의 역사를 간직한 서울 종로의 스카라극장은 2005년 돌연 무단철거 됐다. 문화재청이 극장을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예고하자 소유주가 재산권 침해라며 반발, 극장의 상징이었던 현관을 훼손하며 문화재 지정 근거를 사전에 제거해버린 것이다. 30년대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전형으로, 반원형 현관 부분이 도로 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독특한 모양새를 자랑하던 극장은 현재 극장터였다는 간판만 남긴 채 사라졌다.

3년 전에는 부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일제강점기 서양풍 별장이 철거됐다. 일제 강점기 지금의 금강공원 일대를 동래읍에 기증한 일본인의 별장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일본과 서양 스타일이 결합한 독특한 양식을 보였다. 당시 일본인들의 별장지로 개발됐던 온천장 일대에서 ‘동래별장’과 함께 중요한 근대건축물로 꼽혔지만, 부산시는 예산 부족으로 해당 건물을 매입하지 못했다. 결국 소유주는 해당 지역에 새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부동산 개발업체에게 건물을 매각하며,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시행중인 ‘등록문화재’ 제도는 2001년 도입되어, 기존 문화재 지정제도를 보완하고 보호방법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을 위해 외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내부 수리를 허용하고, 다른 용도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촉진하며, 건축 기준을 완화, 세재와 수리에 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에 한해서다. 건축물은 건축 당시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과거를 알고 보존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기억을 잃으면 역사의 잘못이 반복될 수 있다는 교훈을 통해 미래의 모습을 다져야 한다. 보수를 가장한 지나친 현대화나 건물의 발자취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활용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이다.

일부 지자체의 근대문화유산 거리에서 기모노를 대여하는 업체가 뭇매를 맞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적산가옥과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는 지역은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로 얼룩진 곳이 대부분이다. 일본에 가지 않아도 일본에 있는 느낌이라며 기모노와 유카타를 입고 적산가옥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과, 옷을 빌려주는 사업주에게 역사를 고려한 사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적산가옥 옆 카페에는 임진왜란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이었던 오사카성 포토존을 설치해놓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이 히틀러 코스프레를 하는 격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느낌이 화려한 궁중예복과 색색의 한복이라면, 근대사는 흑백영화처럼 어둡고 칙칙하다. 식민 지배를 당했던 어두운 시대였고, 그 사이 국토 전체가 쑥대밭이 되는 전쟁마저 휩쓸고 지나갔다. 당장 먹고 사는 데 급급했던 우리는 진득하게 마주할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근현대사의 굴곡을 담고 있는 지역들은 재산권과 역사 보존으로 계속 술렁이게 될 예정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군수물자를 옮기기 위해 만든 부산의 매축지 마을은 시민 활동가들의 스토리텔링 작업이 초석이 되어 시가 마을 역사보존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문화재로 추진할 만큼 과거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근대사 굴곡을 보존하기 위한 대안은 필요해 보인다는 것이 지자체의 입장이다. 하지만 수십 년을 기다려온 재개발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조합원들 사이에 번져 반발을 하는 사람도 있는 상황이다.

슬픈 시대에서 비롯된 것들을 모두 없앤다고 그 시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집을 부동산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아파트 세대에게 추억할 집마저 앗아갔다. 우리는 이미 많은 역사적인 시간들을 잃었다. 과거와 닿는 매개체 하나 없이 그저 편의만 추구한다면 삶은 삭막해질 뿐이다. 아픈 역사와 고단한 시간을 지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까지 보듬을 수 있는 방안을 마을 사람들과 전문가, 지자체 등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