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속 섬마을, 푸른 솔의 고장 청송의 시간은 신선세계에서 온 것 같은 깨끗함 그대로 천천히 흐른다. 태고의 신비를 한아름 품은 채 푸른 숲과 맑은 물이 어우러져 시선을 두는 곳마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자태를 자랑한다. 울창한 산림에서 불어오는 청명한 바람은 빌딩숲에서 지친 심신을 위로해준다. ‘주왕산 국립공원’의 기암절벽과 폭포, 신비로운 ‘주산지’, 한국판 알프스 ‘백석탄 계곡’, 만석꾼의 흔적을 간직한 ‘송소고택’, 대하소설 ‘객주’의 흔적을 찾는 ‘객주문학관’과 ‘외씨버선길’을 따라 울긋불긋한 단풍을 만끽해보자.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단풍 ‘주왕산’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암산(岩山)으로 꼽히는 명산이다. 당나라의 주왕이 숨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천년고찰인 대전사를 비롯해 아름다운 계곡, 폭포와 굴이 있다. 곳곳마다 우뚝 솟은 기암절벽이 폭포와 소(沼)와 어우러진 신비스런 경관을 자랑하며, 숱한 전설과 비경을 간직한 채 숨 쉰다.
주왕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전사를 거쳐야 한다. 거대한 입석처럼 솟은 3개의 바위 아래 터를 잡고 있어, 힘이 넘치는 웅장한 기상을 자랑한다. 대전사를 지나 주방천을 따라 걷다보면 바위들이 미로처럼 엉켜있는 주왕굴이 나타난다. 바위들이 마치 석문처럼 마주 본 채 서 있고, 꼬불꼬불한 길을 헤쳐 나가면 주왕암이 선물처럼 나타난다. 주왕이 은거했다는 전설이 사실처럼 느껴질 정도로 병풍암을 비롯한 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다.
주왕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산책로는 ‘주왕계곡 코스’다. 대표적인 자연경관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경사도 평탄해 온 가족이 부담 없이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 걷다보면 용추폭포, 절구폭포, 용연폭포 등 빼어난 경관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중 용연폭포는 주왕산의 가장 큰 폭포로 보는 순간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한적한 주왕산이 시끌벅적해지는 시기는 사계절 중 가을이 가장 으뜸이다. 전국 각지에서 단풍객들이 모여들 정도로 주왕산의 단풍은 특별하다. 주왕산 봉우리 정상과 그 사이사이에 물들고 있는 가을 단풍의 모습에서 새신랑이 새색시의 붉은 연지곤지를 보는 것과 같은 설렘이 느껴진다. 단풍을 제대로 즐기려면 명소가 많은 외주왕이 아닌 내주왕으로 향해야 한다. 내주왕은 외주왕에 비해 사람의 손길이 덜 미친 곳으로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보존돼 있다. 인적이 드문 곳, 수북이 싸인 낙엽을 밟으며 산을 오르다보면 신화 속 신선이 된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주산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 한층 더 유명해진 주산지는 예전부터 사진작가들에게 빼어난 촬영지로 알려진 명소다. 주왕산 입구의 남쪽 별바위골 끝자락에 있으며, 조선 경종 원년(1721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는 신비로운 호수다.
굴참나무, 굴피나무, 망개나무들이 서 있는 산책로를 걸어 제방을 지나면 주산지가 나타난다. 물에 잠긴 채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왕버들이 수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워 마치 물속에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듯하다. 초록빛으로 일렁이는 물속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상을 만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몽환적이다.
새벽의 주산지는 물안개가 포위한다. 하늘에서 신이 잠시 내려온 것 같은 아득한 풍경은 꿈처럼 황홀하다. 가을이 되면 단풍빛이 더해져 태고의 신비로움마저 느껴진다. 짧아서 더 아쉬운 계절 가을이 한 폭의 그림이 돼 주산지 안에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태고의 세월을 간직한 ‘백석탄 계곡’
공룡 발자국과 퇴적층, 비경 속에서 태초의 신비를 만끽하는 지질관광 지오투어리즘(Geo-tourism)에 관심이 있다면 신성계곡 내 백석탄 계곡으로 향하자.
청송은 국가지질공원으로 등재될 만큼 지질 명소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신성계곡 일대에서는 방호정 퇴적층과 신성공룡발자국, 백석탄 3곳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하얀 돌이 반짝거리는 여울’이라는 뜻을 가진 백석탄은 억겁의 세월 동안 깎이고 다듬어진 하얀 암반으로, ‘포트홀(pot hole)’이라 불리는 돌개구멍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모래나 자갈이 물과 함께 소용돌이치면서 암반을 마모시켜 발달시키는 지형으로, 한 폭의 추상화처럼 느껴진다. 계곡 여기저기 생채기처럼 그어진 절리는 약 1억2000만년의 세월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온통 눈으로 덮인 듯이 하얀 바위 위로 흐르는 맑은 물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시상이 떠오를 정도다.
덕천마을 ‘송소고택’에서 시간여행
청송 덕천마을에는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7채의 고택이 있는데, 이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심부잣집 ‘송소고택’이다.
경주 최부잣집과 더불어 조선시대 영남 부자의 양대산맥으로 알려진 송소고택은 청송 심부잣집으로 더 유명하다. 심처대부터 1960년대까지 무려 9대에 걸쳐 2만석꾼을 배출했고, 조선시대 왕비 3명이 이곳 ‘청송 심씨’ 출신일 정도로 명문가다. 현존하는 99칸 고택 3군데 중 하나가 2002년부터 체험 시설로 개방돼 해마다 5~6천 명의 방문객이 다녀간다. 울창한 산세에 둘러싸인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뜻하지 않은 시간 여행처럼 느껴질 것이다.
대하소설 「객주」를 만나다 ‘객주 문학관’
독서의 계절 가을에 청송을 찾았다면 대하소설 「객주」의 향기에 젖어보자. 「객주」는 19세기말 조선 팔도를 누빈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민중 생활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김주영 작가의 대하소설로, 청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순수한 기억이 우러나있다.
「객주」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객주 문학관’으로 향해야 한다. 오래전 폐교된 진보 제일고 건물을 활용해 작가의 문학 세계를 담은 전시관과 소설도서관, 스페이스 객주, 영상 교육실, 창작 스튜디오, 세미나실, 연수 시설 그리고 작가 김주영의 집필실인 여송헌(與松軒) 등으로 구성돼 있어 조선 후기에 활동하던 보부상들의 활동상이나 조선 후기 상업사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소설 속 보부상처럼 가을 청송을 걸어보는 것도 색다른 묘미다. 우리나라 대표 청정지역인 청송, 영양, 봉화, 영월 4개 군을 통과하는 ‘외씨버선길’ 중 셋째길 ‘김주영객주길’에서는 주산지와 감곡저수지 등이 있어 뛰어난 풍광을 볼 수 있다. 길을 느릿느릿 걷다보면 그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가을철 볼거리가 풍성한 청송이지만 체험도 빠질 수 없다.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초순경에는 청송사과를 직접 손으로 따서 그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사과따기 체험행사’가 열리며, 청송백자, 청송옹기, 청송한지, 청송염색 등을 장인들에게 직접 배워보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달기약수도 빼놓지 않고 들려서 맛보자. 달계약수라고도 부르는 달기약수는 철분과 탄산 등이 풍부한 물이다. 철분 가득한 특유의 알싸한 맛이 익숙하지 않다면, 약수터 주변에서 닭백숙으로 맛보자. 초록빛이 도는 달기약수 닭백숙은 청송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