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훌륭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예전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인물들이 종종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속담이 잊혀 질 정도로 드물다.
조선일보는 “‘개천용’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개천용’을 가능하게 했던 교육이란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면 최근 황성수 한국직업능력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이 발표한 ‘PISA를 활용한 국가별·시점별 교육 형평성 측정방안 연구’ 논문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성적 상위 25% 학생 중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하위 25%인 학생들’, 즉 ‘개천용’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PISA는 전 세계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읽기, 수학, 과학 과목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5년 마다 주관한다. 가장 최근인 2018년에는 우리나라 6876명을 포함, 79국 출신 60만 명이 참가했다. 다음은 조선일보 보도 전문이다.
◇개천용 줄어든 건 한국뿐
황 위원은 2006년과 2018년 PISA에서 한국, 미국, 스웨덴, 일본 등 4국 학생 성적과 집안 형편을 비교했다. 그 결과, 한국의 ‘개천용’ 비율은 2006년 13.46%에서 2018년 11.68%로 1.8%포인트 줄었다. 일본(11.85→9.89)과 스웨덴(10.66→9.94)도 줄었지만, 미국(7.78→8.88)과 OECD 평균(9.25→9.91)은 높아졌다. 과목별로 따지면 읽기(15.29→12.97%), 수학(12.02→10.79%), 과학(14.13→13.38%) 등에서 ‘개천용’들이 줄었다.
성적이 최상위권인 상위 4% 이내에서도 한국의 ‘개천용’(사회·경제적 배경이 하위 25%)인 학생들은 2006년 7.5%에서 2018년 6.39%로 역시 줄고 있었다. 특히 과학을 잘하는 학생 중 ‘개천용’ 비율은 2006년 12.09%에서 2018년 6.14%로 폭락했다. ‘개천용 실종 사건’은 사실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나라가 좀 더 심하다는 게 문제다. 조사 대상 4국 중 읽기, 수학, 과학 등 전 과목에서 개천용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줄어든 국가는 우리뿐이다.
◇소득 따라 벌어지는 사교육비 격차
교육계에서는 이렇게 개천용이 줄어드는 것은 학업 성적과 대학 입시가 부모의 경제력·정보력과 깊게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지난해 교육부 사교육비 조사에서 월평균 소득 800만원 이상인 고소득층의 1인당 사교육비는 53만9000원으로, 월평균 소득 200만원 미만 저소득층(10만4000원)의 5배를 넘었다. 돈이 많아야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받고, 사교육으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잡는 세습 고리가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6년 조사에서 아버지가 대졸 이상 고학력자일 때 자식도 고학력인 비율은 산업화 세대(1940~1959년생) 64%, 민주화 세대(1960~1974년생) 79.7%, 정보화 세대(1975~1995년생) 89.6% 등으로, 갈수록 세습 고리가 굳건해지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진다는 우려가 나온다. 학교에 제대로 못 가는 동안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학력 격차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영국 국립교육연구재단이 작년 7월 초·중학교 2200곳의 교사 3000명에게 물었더니, 코로나로 원격 수업이 시작된 후 아이들 학습 수준이 예년보다 3개월가량 뒤처졌고, 특히 가난한 지역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지역 아이들의 학력 격차가 46% 더 커졌다고 대답했다.
◇“재능보다 집안 배경이 성공에 중요”
계층 이동 가능성을 믿는 국민들도 갈수록 줄고 있다. 통계청의 2019년 사회조사에서 ‘자식 세대에서 일생 노력을 다한다면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009년 48.3%에서 2019년 28.9%로 현저히 낮아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여론분석팀이 지난해 30세와 60세 각각 500명에게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30세는 ‘집안 배경’(30.2%)을 1순위로 꼽았다. 60세는 ‘재능’(23.7%)이 중요하다고 봤다. 개인 노력에 따라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30세는 부정적 인식(42.8%)이 긍정적 인식(21.4%)의 두배였다. 60세는 긍정·부정 인식 간 별 차이가 없었다. 조사팀은 “우리 사회 구조에 대한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좌절감을 읽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황성수 위원은 “과거 우리 사회의 거의 유일한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교육이 제 역할을 못 하고,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면서 “이는 사회의 공정성을 해치고 미래 발전을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이명이 기자 lmy@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