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은 예로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으로 불렸다. ‘살아서는 진천에 사는 게 좋다’는 뜻을 지닌 별칭답게 살기 좋은 고장이다. 그만큼 여행하기 좋은 자연 경관과 다양한 유적·명승지가 많다. 그 중 진천군을 대표하는 관광지 다섯 곳을 소개한다.
자연의 소박함과 어우러진, 진천 농다리
진천 농다리(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는 천 년을 이어온 신비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 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긴 돌다리로 하늘의 별자리에서 모티브를 얻은 전체 28칸 교각의 다리다.
농다리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의 굴티 마을 앞에 위치해 있으며 1000여 년 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다리는 흐트러짐 없이 건너는 이의 발걸음을 고스란히 견뎌낸다. 다리는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폭 80cm다. 100m 채 안 되는 거리지만, 깎고 다듬어지지 않은 돌을 신중히 밟다 보면 다리가 제 길이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그만큼 다리의 옛스러움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있다. 또한, 자그마한 돌들이 모여 이뤄진 이 다리 밑으로 흐르는 시원한 물살이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듯하다.
‘농다리’의 ‘농’자를 두고는 해석이 분분하다. 물건을 넣어 지고 다니는 도구의 ‘농(籠)’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고려 시대 임연 장군이 ‘용마(龍馬)’를 써서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에서 ‘용’이 와전되어 ‘농’이 됐다는 말도 있다. 어찌 됐건, 농다리를 보고 있다 보면 이보다 더 부르기 쉽고 정겨운 어감의 이름은 없는 듯하다.
초평저수지에 뜬 작은 한반도, 한반도지형전망대에 올라 보다
초평호 한반도지형은 전국에서 가장 한반도 지형을 잘 나타내고 있어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다. 전망대에 올라 초평호를 굽어보면 위로는 중국, 아래로는 한반도 지형과 제주도의 형상과 일본 열도가 있는 것처럼 보여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담아낸 듯하다.
저수지를 흐르는 감입 곡류하천이 저수지 인근 토지의 지표면을 깎아내며 한반도를 꼭 빼닮은 지형을 만들었다. 실제로 모양만 닮은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관찰되는 토양의 지층이 한반도 지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한, 전망대에 올라 저수지를 바라보면 아래에 있을 때는 지각하지 못 했던 ‘ㄹ’자 형태를 띈 저수지와 이를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는 산의 경관은 아름답기만 하다.
저수지, 전망대와 함께 들러보면 좋을 곳이 바로 붕어찜 마을이다. 저수지 인근에는 붕어찜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스무 곳이 넘을 정도로 많다. 1980년대 중부고속도로 건설 현장 노동자들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초평에서 처음으로 붕어찜을 개발해 팔기 시작했다는데, 조선 왕실의 보양식으로 언급될 만큼 보양식으로 일컬어지는 음식이니 허기를 달랠 겸 가보는 것도 좋다.
더불어 사는 가치를 알려주는, 보탑사 통일대탑
신라 때 김유신 장군이 민족통일을 이뤄냈듯 남북이 통일되기를 기원하며 지은 삼층목탑인 통일대답은 대목수 신영훈 선생의 역작이다. 목탑 가운데서는 세계에서 최대(42.7m)이며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3층까지 지어졌다. 탑을 떠받치는 기둥만 29개에 달하고 상륜부를 제외한 높이가 42.37m에 이른다. 이를 목재를 끼워 맞추는 전통방식만을 고수해 완성했다니, 옛 선조의 지혜를 보존코자 했던 목수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탑의 모양이 일반 탑 규모가 아닌,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궁과 같은 크기라 더욱 그렇다.
보탑사는 충청북도 진천군 보련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사찰 주변으로 도덕봉, 약수봉 등 아홉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것은 보탑사의 고즈넉함을 더욱 배가시켜준다. 자연과 사찰이 한데 어우러지기 좋은 곳인 만큼, 이곳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큰 절이 있었다.
보탑사의 삼층 목탑이 주목받는 이유는 신라시대 황룡사 구층 목탑을 모델로 해서다. 신라시대 이후 사라진 양식을 재현했다는 역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탑 양식을 온전히 보존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나무가 서로를 지탱하고 맞물려 있는 탑을 보고 있노라면, 묵직한 감동이 밀려온다. 사람과 엉켜 살며 서로 헐뜯기보다는 탑의 구조물처럼 주변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진짜 인생사는 법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보탑사의 고요함과 함께 지난날을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소담한 배티성지는 천주교 박해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배티성지(지방기념물 제150호)는 한국천주교 중요성지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인 조선교구신학교 터가 위치하고 있다. 현재 배티성당을 위시한 주변 지역은 천주교 박해기에 교우촌으로 형성됐다.
이곳은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자,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를 비롯해 수많은 순교자가 탄생된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진천 배티성지는 이렇듯 의미가 남다름에도 불구하고, 성지의 본래 모습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현재 성지가 있었음을 알리는 것은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과 2001년 목조 초가로 재현된 조선교구 신학교 등이다.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조차 일제강점기 때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해 지금은 신자들의 생업 영위 수단이었던 옹기점과 무명 순교자의 묘만이 남아있다. 유교가 중심인 조선 사회는 천주교의 평등사상을 조선의 신분제를 뒤흔들만한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박해 당시 각종 형기들을 전시한 양업전시관을 가보면, 박해역사의 아픔을 더욱 절감할 수 있다.
정송강사에서 정철을 만나다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지방기념물 제9호다. 정철은 조선시대 정치가로 좌의정을 지냈으며, 김인후 등의 문인으로 명종 16년 진사와 별시문과에 장원, 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내고 율곡과 함께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원래 묘소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1665년(현종 6) 송시열(宋時烈)이 현재의 장소를 정하고 후손 정포(鄭浦)가 이장해 사우를 건립했다.
정철은 가난한 백성의 애달픔을 슬퍼할 줄 아는 관료였다. 선조는 그를 두고 “마음이 곧고 행실은 바르나 다만 그 말이 곧아 당대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노라”라며 그의 절개를 아까워했다. 정철의 흔적이 남은 곳에 들러 그를 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단순 역사인물을 만난다기 보다, 그의 정신을 공유하는 시간이지 않을까.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는 정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원래 송강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에 있었는데 1665년 송시열이 묘소를 지금의 자리로 정하고 후손 정포가 이장했다. 경내의 건물에는 기념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정철의 유품인 은배, 옥배, 서간첩 등이 보관돼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은잔은 정철이 선조에게 하사받은 술잔이다. 야사에 따르면 술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정철을 선조가 딱하게 여겨 소주잔 같이 작은 은잔을 주며 ‘앞으로 하루에 이 잔으로 딱 석 잔만 마시거라’ 했다고 한다. 곧은 성품 탓에 관료들과 잦은 논쟁을 벌였던 그는 어쩌면 은잔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시로 마음을 다 잡지 않았을까.
전세리 기자 jsr@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