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덜 나쁜 악이 더 큰 악보다 선호가 크고, 선호가 크다는 것은 좋은 것이므로 덜 나쁜 악은 더 큰 악과 비교할 때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선거는 최선의 후보를 뽑는다기보다 차악(次惡)의 후보를 뽑아야 할 때도 있다. 최선과 차선의 대결이 아니라 최악과 차악의 경쟁 구도에서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같이 정치만 잘하면 된다고 보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더 나쁘고, 덜 나쁜지를 놓고 선택해야 된다면 당연히 덜 나쁜 이를 뽑아야 한다. 작금의 한국 정치계를 놓고 보면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유권자들이 많을 것이다.
내년 대선에 나설 여야 거대 정당의 후보가 이재명과 윤석열로 결정됐다. 하지만 정책 대결로 선(善)한 후보를 뽑는 최선의 선택보다는 두 후보의 ‘법적 리스크’가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유권자들이 ‘대장동 개발’과 ‘고발 사주’ 의혹을 놓고 누가 더 윤리·도덕적으로, 법적으로 덜 나쁜가를 선택해야 할 지경이다. 쌍방이 거짓과 선동, 배제와 독선으로 국민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적(政敵)에 대한 검증을 명분으로 증오의 대결을 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집권 전에도, 후에도 권력 창출과 유지·재생산을 위해 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게 좌파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허민(행정학 박사)은 문회일보 ‘정치카페’에서 “대한민국 유권자는 또다시 두 개의 악 중 덜 나쁜 악을 골라야 하는 ‘레서 이블(lesser evil), 차악 선택의 딜레마에 봉착했다”고 했다.
차악의 선택을 해야 하는 이유로 그는 두 후보 모두 국회의원 등 중앙정치의 경험이 없고, 각종 여론 조사에서 비호감도가 호감도의 두 배 가까이 된다는 점, 수사·사법 리스크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특히 그는 즉 대선 후보들의 운명이 사법 당국의 수사에 좌우되는 건 우리 정치사상 ‘초유의 참(慘 참혹)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차악의 선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념적 중도층, 정치적 무당파, 2030 세대라며, 이들을 겨냥한 ‘제3지대’ 소구력이 대선의 변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을 갖고 강력한 변화를 희구하는 부류라고 했다.
선택은 국민의 권리다. 부화뇌동하지 말고,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유권자 의식에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이제 국민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 본다.
이명이 기자 (jun939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