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어디 나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잠이 쏟아져서 눈 뜨면 오후, 집에서 뒹굴 거리다 보면 일요일 저녁이더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평일처럼 아침에 눈이 떠지고 주말을 길게 쓸 수 있게 됐어요. 제가 집순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고요.”
52시간 근무가 시작되고 평일 저녁을 보장받게 된 직장인 윤 모(33)씨는 잃어버린 주말을 되찾았다.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부족한 수면, 집 청소 같은 것을 주말에 몰아했던 그녀는 이제는 여유 있는 주말을 꿈꾼다. 윤 씨는 “다음 주에는 근교로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올 계획”이라며 즐거워했다.
최근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주당 법정 근로시간이 현행 68시간에서 52시간(법정근로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며 종업원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공기관은 2018년 7월 1일부터 ‘주당 근로시간 52시간’을 지켜야 한다.
OECD가입 34개국 중 근로시간 2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주중에 과도한 야근에 시달리던 근로자들은 이제 여유로운 주말을 꿈꾼다. 공연 보기, 운동 등 다양한 문화생활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만큼 일상을 환기시키고 다양한 경험을 주는 여가생활도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을 반영하듯 올해 여름휴가 일수가 소폭 증가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 7월 10일 발표한 ‘2018 하계휴가 실태 조사’를 보면 올해 주요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의 평균 하계휴가 일수는 4.1일로 지난해(3.9)일보다 0.2일 증가했다. 조사는 전국의 5명 이상이 일하는 585개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기업 규모별로는 300인 이상 기업이 4.8일, 300인 미만 기업이 4.0일로 나타났다. 300인 이상 기업은 전년(4.5일)보다 0.3일 증가했으며, 300인 미만 기업은 전년(3.8일)보다 0.2일 늘었다. 평균 1주일도 안 되는 휴가인데도, 절반 이상의 기업들은 예년에 비해 연차휴가 사용 분위기가 자유로워졌다고 답했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17년에도 국내 관광업계의 매출과 관광객 수가 전년 대비 평균 15%가량 증가했다. 여기에 52시간 시행으로 여가시간이 늘어난 격이니 관광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한국관광공사는 최근 2년간의 소셜미디어와 포털미디어 빅데이터를 활용해 올해 다섯 가지 여행 트렌드 ‘S·T·A·R·T’를 발표했다. S는 근거리여행(Staycation), T는 여행스타그램(Travelgram), A는 혼행(Alone), R은 도시재생(Regeneration), T는 여행예능(Tourist sites in TV programs)을 의미한다.
여행이 일상화되면서 당일치기, 1박 2일의 근거리여행이 각광받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여행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소소한 일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각종 SNS의 발달은 인생샷을 남기려는 열풍을 낳았다. 다른 사람의 SNS에서 발견한 곳에 가보고 싶은 욕구가 커지고, 유명 관광지보다는 나만 아는 낯선 생활공간, 뒷골목, 시장 등에서 색다른 매력을 찾는 소소한 여행도 각광받는다.
해외여행 시장도 대폭 증가세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최근 3년간 내국인 해외여행 시장도 연평균 18.1% 성장했고, 올해 내국인 출국자 수는 지난해보다 14.2% 늘어난 3,025만 명으로 전망된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1인당 해외여행 횟수는 2011년 평균 1회에서 지난해 2.6회까지 증가했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출발한 항공권 예약 약 17만 건을 분석한 결과, 예약의 90%가 비행 거리 약 4시간 이내의 단거리 구간에 집중됐다. 인기 도시 상위 10위권 모두 단거리 여행지였다.
여름휴가에도 이 분위기는 이어질 예정이다. 장거리 여행의 피곤함을 피하기 위한 동남아시아 등 단거리 여행지의 인기가 여전히 높다. 한 여행사의 조사 결과 올 여름 인기 휴가지 1위는 부동의 선두인 일본을 밀어내고 베트남 다낭이 차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해도 ‘가성비’와 심리적인 만족인 ‘가심비’를 충족시키는 여행은 대세가 될 전망이다. 한국관광공사의 ‘2017 해외여행 실태 및 2018 해외여행 트렌드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기내식 등의 서비스가 없는 대신 요금이 저렴한 저가항공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예약하기 위해 스마트폰에 여행예약 앱이나 가격비교 앱을 다운 받아 수시로 가격을 검색해 비교하는 것은 이제는 흔한 풍경이다.
가성비에 더해 가심비도 무시할 수 없다. 가심비는 가격 대비 심리적 안정과 만족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으로, 일명 ‘플라시보 소비’다. 가심비의 대표적인 형태는 도심 근교 호텔에서 주말이나 휴가를 즐기는 ‘스테이케이션’ 또는 ‘호캉스’다. 휴가철을 맞아 다양한 호캉스 상품을 내어놓는 호텔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 이유다.
나홀로 여행, ‘혼행족’은 점점 증가할 추세다. 500만으로 추산되는 1인 가구는 여러 분야에서 소비 트렌드를 주도하는 핵심계층, 여행 업계도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과 일정 조율이 필요 없다는 혼행의 장점을 극대화해, 계절이나 시기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여행을 떠나는 즉흥여행족도 꾸준히 증가추세다.
여행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가족 여행도 증가했다. 기존의 가족 여행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면, 최근의 가족 여행은 3대가 함께하거나, 성인 자녀와 함께하는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가족 여행으로 각광받고 있는 곳은 저렴한 비용으로 편하게 휴식까지 취할 수 있는 동남아 등지다.
올해 중소기업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된 ‘근로자휴가지원제도’도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지원자들이 몰렸다. 정부와 회사가 국내여행 휴가비를 20만 원 지원하는 이 제도에 모집 인원의 5배가 넘는 10만 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지원했다.
한국관광공사 관계자는 “‘워라밸’ 문화의 확산으로 국내 관광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어서 관광정책도 국내 관광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올해 큰 인기를 끌었던 근로자휴가지원제도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며 점차 여행은 일상화 돼가고 있다. 여행은 큰돈을 들여야 하는 사치스러운 일탈이 아니다. 자아를 찾고 싶은 욕구, 휴식, 또 다른 삶의 원동력 등 일상을 빛내주는 보석 같은 여가생활이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