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편일률적인 놀이터는 아이들의 창의력 발전에 도움 안돼
평범한 놀이터의 불편한 진실
불과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공터에서 놀았다. 시골 아이들에게 산과 들, 강가와 바닷가는 훌륭한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흙을 만지고, 풀숲을 달렸고, 제멋대로 물에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소란스럽게 노는 것은 아이들의 특권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놀이는 그야말로 모험 그 자체였다.
도시화·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의 놀이터도 그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네(Swing), 시소(Seesaw), 미끄럼틀(Slide), 모래밭(Sandbox)이 있는 4S를 기본 골자로 아이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놀았다. 놀이터의 4S형태는 1950년 미국에서 산업화·규격화를 위해 만들어졌고, 일본이 받아들인 것을 1960년대 한국이 모방한 이후 지금까지 변경 없이 표준처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요즘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는 썰렁하기만 하다. 놀이시설 안전을 이유로 아예 놀 곳 자체를 막아버리거나 주차장 등으로 바꿔버리는 만행이 일어나기도 했다.
놀이터는 도시의 산물이다. 산업화로 거주지와 일터가 분리됐고, 어른들이 일하러 간 사이 방치된 채 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다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한 공간이 바로 놀이터다. 발생 단계부터 아이들이 어떤 형태의 놀이시설을 원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다. 현재의 놀이터들은 아이들이 다치지 않는 것만 과하게 의식한 상태다. 세균이 많이 증식한다는 이유로 놀이터 바닥은 모래밭 대신 우레탄이 깔렸다.
그네를 타거나, 미끄럼틀을 타거나, 시소를 타거나, 그저 타는 것만 할 수 있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창의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위험요소가 배제된 놀이터는 무균실과 같다. 아이들은 위험을 알아차리고 위험에 대처하는 연습이 필요하지만, 현재의 놀이터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한 교육 예술 작가의 말처럼 너무 안전한 놀이터는 아이의 자립심과 모험정신을 방해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모험놀이터
모험 놀이터는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를 자신이 결정하는 게 허락되는 놀이터다. 뻔한 놀이기구 대신에 흙과 나무가 있다. 나무를 타고, 흙에서 구르고, 모닥불도 지필 수 있는 자연 친화적 놀이공간이다. 플라스틱이나 철재 등으로 이뤄진 인공 시설물은 최소화해 아이들이 자유롭게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장소다.
모험 놀이터의 가장 큰 특징은 고정된 형태의 일반 놀이터와 달리 모습과 형태가 아이들의 손에서 계속 바뀐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이 아닌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아이들의 감성과 호기심은 자극된다. 더불어 자주성과 창조성도 키울 수 있다.
모험놀이터의 시초는 덴마크다. 1943년 조경가 카를 쇠렌센은 코펜하겐 엠드루프 주택단지 안에 폐자재 정크놀이터를 만들었다. 이 놀이터에 감동한 영국의 앨런 부인은 켄징턴 클라이즈데일 도로에 모험 놀이터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모험 놀이터는 전 세계로 퍼졌다.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켜 주민들이 직접 모험놀이터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놀이터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들고 관리한다. 안전사고와 각종 민원 때문에 놀이기구에서 모험적 요소는 점점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놀이터를 이용하는 아이들은 더는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모험놀이터 사례를 접한 사람들의 요청이 빗발쳤지만, 각종 행정규제와 절차상의 문제로 놀이터의 변화는 더디기만 했다. 결국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놀이터 워크숍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시민 자체적인 활동에 힘입어 지자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서울시교육청은 시내 단설 유치원 중심으로 놀이 친화적인 놀이터 공간 혁신에 나서겠다고 전면 밝혔으며, 7월 4일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는 창의적인 놀이터인 ‘맘껏 놀이터’가 개장했다. 1200평 규모의 ‘맘껏 놀이터’는 기존 놀이터를 철거한 뒤 조성됐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극심한 경쟁 속에서 잃어버린 한국 어린이의 놀 권리를 회복하도록 한국 정부에 권고해 나온 결과물이다.
모든 어린이가 주인인 놀이터, 자유를 만끽하는 놀이터, 모험과 도전,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놀이터, 편안히 쉬고 놀 수 있는 자연친화적 놀이터,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열린 놀이터 등 5가지가 놀이터를 조성한 기본 방향이다. 이에 따라 고리 모양 언덕, 미끄럼틀, 놀이집, 낙서벽, 모래 놀이터, 바닥 놀이터, 물놀이 시설, 암벽 타기, 휴게 나무 데크 등이 마련됐다. 대부분 정형화되지 않은 모양으로 제작돼 어린이들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도전하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곳곳마다 위험요소를 남겨놓아 어린이들이 스스로 위험요인을 인지하고 대처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 서울어린이대공원 운영시간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모험놀이터는 전국 각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서울 도봉구 창동 초안산 입구의 ‘뚝딱뚝딱 놀이터’, 인천 남동구 노현동의 놀솔길근린공원, 세종시 원수산의 습지생태원, 청주시의 ‘아이뜨락’등이다. 특히 순천시는 지난해부터 ‘기적의 놀이터’라는 이름의 모험놀이터를 이미 2곳을 운영 중이다.
한국 아이들은 학원에 치여 바쁘다.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선 학원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어릴 때는 아무 목적 없이 즐거워야 한다. 호기심과 창의력을 충족시키는 데 체험프로그램과 키즈카페는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강박일 뿐이다. 놀이조차 돈을 주고 소비해야하는 덧없는 사회다.
놀이터가 없어도 골목과 공터,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 놀 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아이들에게 흙과 바람과 나무를 돌려줘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다운 놀이터가 필요하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