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전병열 에세이 l 행복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데…

전병열 에세이 l 행복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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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잦아들면서 나의 즐거운 추억여행도 멈췄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글. 전병열 편집인(언론학 박사/수필가)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싱그러운 목련나무가 성큼 다가선다. 잎의 연푸른 색깔이 더욱 선명하게 창문을 가득 메운다. 빗줄기를 피하려는 듯 이름 모를 새들이 목련 잎 속에 깃든다. 이웃집 후배가 자기 집에서 분양해 정원 언저리에 심어준 수국이 빨간 꽃송이를 활짝 펼치고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텃밭에 심은 고추가 활기를 펼치고 짙푸른 깻잎은 왕성하게 빗물을 받아 낸다. 창문을 열고 좀 더 가까이서 정취를 느끼고자 다가가 본다. 재잘거리는 새들의 대화가 아늑한 감상에 젖게 한다.

계획에 없던 시간이라 초조하고 답답했든 가슴이 빗소리에 진정되고 짙어가는 녹색의 향연에 위로를 받는다. 항상 계획된 일상을 살아온 터라 아직도 무계획한 시간은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긴장이 고조된다. 느긋하고 편안한 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하지만 한가로운 시간이 오히려 불편하다면 일 중독자가 아닐까.

애초 오늘은 농장에 매실을 따기 위해 고향으로 갈 계획이었다. 고향집 정원의 잡초도 제거하고 부추밭도 김을 매줘야 한다. 농장의 잡초도 예초기로 밀어줘야 하지만 그럴 시간이 주말밖에 없는데 그나마 다른 일정이 잡히면 갈 수가 없다. 지난해도 수확의 적기를 놓쳐 매실이 모두 낙과한 후라 구경도 못했다. 올해는 미리 일정을 잡아 뒀다. 그런데 속절없는 날씨로 계획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요즘은 매실이 흔해빠졌어요. 시장에 가면 오천 원만 줘도 충분히 살 수 있어요. 연료비만으로 사고도 남아요. 그냥 버리세요.” 아내의 위로가 오히려 서글프기만 했다. 그동안 매실 농장을 가꾸면서 많은 애정을 쏟았었다. 매실 수확에 욕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화사한 매화를 즐기고 알알이 영글어가는 열매를 보면서 시름을 달래는 안식처가 매실 농장이었다. 건강식품으로 인기가 있을 때는 매실청을 담그거나 이웃과 나누는 재미로 피로를 잊었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래서인지 남들은 그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나에게는 애착이 많은 농장이다.

매실 농장은 우리 가족의 생계를 지켜 준 땅에 조성했다. 고구마를 심어 한겨울의 양식과 간식을 마련한 곳이었다. 부모님의 애환이 서린 유산이기에 더욱 소중한 땅이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잡목이 우거져 폐허가 되다시피 한 땅을 정비해 우리 회사 직원 30여 명이 야유회 겸 일손 돕기에 나서 매실 등을 심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매화가 필 때 매화나무 아래서 따사로운 햇볕을 마주하고 차 한잔하는 게 꿈이었다. 매실이 자라기까지는 잡초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쉴 새 없이 농장에 매달렸다. 그렇게 가꾼 매실이 이제 천덕꾸러기가 될 정도라니 안타깝기만 하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 속으로 고향의 산천이 그려진다. 이곳에 터를 잡을 때는 고향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서 선택했다. 도심의 답답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자연의 정서가 풍기는 곳을 찾던 중 집 앞 동산이 고향을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정원도 가꿀 수 있는 마당이 있고 고향집 앞 개천을 닮은 도랑도 있었다. 황령산 자락이라 등산이나 산책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아내와 의논 끝에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한 것이다. 아내는 “셋방과 전셋집으로 전전하다 우리 집을 갖고 보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집 없는 서러움이 복받칠 때가 많았다. 집주인 눈치를 보며 비위에 거슬리지 않도록 애쓰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격세지감이지만….

돌밭이던 마당을 정원으로 가꾸고자 화단을 만들고 조그마한 잔디밭도 조성해 아이가 뛰놀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다. 우리 부부는 휴일에는 온종일 정원 가꾸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뒷산에 억새를 잔디로 알고 잔뜩 옮겨 심었는데, 건축업자가 어이없어하며 잔디로 교체해 심어주던 일 등등, 에피소드가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난다. 그 잔디밭이 아내의 성화(?)로 텃밭이 돼 식탁을 싱싱하게 만들고 있다. 빗줄기가 잦아들면서 나의 즐거운 추억여행도 멈췄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추억이 행복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